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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이젠 일상이다' <중> 수직적 가르침에서 수평적 배움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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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철도 폐선부지를 재활용한 광주광역시 푸른길공원에서 지난달 24일 거리의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전남 지역 인문학 시간강사들의 모임인 ‘무등지성’이 주최한 행사다. 강사로 나선 시인 이송희(왼쪽 마이크 든 사람)씨는 “시는 다양하게 우리 삶을 파고든다. 남들이 좋다는 시 말고 자기 취향에 맞는 시를 찾아 읽으라”고 권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를 쉽게 풀어내는 인문학 대중화의 현장이다. [광주=프리랜서 오종찬]

지난달 24일 오후 광주광역시 남광주시장 인근의 푸른길공원. 철도 폐선부지를 재활용해 조성한 도심공원에 문화의 향취가 흘렀다. 피아노 연주에 이은 시 낭독 순서. 사전에 섭외된 청중 가운데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시를 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청중이 낭송한 시는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다. 이날 청중은 50여 명. 수염 덥수룩한 중년 남성, 50대 주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20대 커플 등. 평소 시와 거리가 멀던 사람들이다.

 이날 행사는 ‘무등지성’이 마련한 ‘한여름밤의 거리 인문학’ 강좌. 무등지성은 전남대 인문학 전공 시간강사들이 주축이 돼 지난해 가을 결성했다. 설립 직후부터 대중을 상대로 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지식이 대학 안에서만 유통되는 폐쇄적인 현실을 개선해보자는 뜻이었다.

 강사로 나선 시조시인 이송희(37)씨는 “남들이 좋다는 시를 쫓아다니지 말고 자기 취향에 맞는 시를 찾아 읽으라”고 다독였다. 그는 청중들에게 질문을 자주 던졌고, 아무런 대꾸도 없는 쪽을 향해 “왜 이쪽은 대답을 안 하냐”고 가벼운 핀잔을 주기도 했다.

 무등지성의 현재 회원은 20여 명. 정의석 사무국장은 “ 가급적 토론식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잘 따라온다”고 했다. 무등지성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택한 전략은 참여 유도와 토론이다.

 이처럼 요즘 일고 있는 인문학 대중화의 특징 중 하나는 공부 방식의 변화다. ‘상명하복식’은 시민교육 현장에서 통하지 않는다. 선배나 친구처럼 자상하게 가르치고 참여를 유도한다. 일방적 교육에서 수평적 배움으로의 방향 전환이다.

 이런 공부모임은 ‘자기복제’도 한다. 토론식 모임을 통해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강사가 돼 주변을 가르친다. 대구의 인문학 공부 모임 파이데이아가 대표적이다.

 파이데이아는 1991년 계명대 교육학과 교수이던 신득렬(69)씨가 만들었다. 시카고대 총장을 지낸 교육철학자 허친스(1899∼1977)의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에 깊이 공감한 신씨는 사재를 털어 팔공산 자락에 북 카페를 열었다. 허친스가 선정한 60권의 ‘위대한 저서’ 읽기에 나섰다.

 위대한 저서는 『일리아드』부터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3000년 서양 지성사를 관통하는 고전을 추린 것이다. 21세기에도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인문학 공부가 필수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곳에서 10년째 공부 중인 정복희(48)씨는 원래 평범한 간호사였다. 건조한 자연과학에 염증을 느껴 파이데이아에서 인문학을 배운 후 “나만 옳다는 식의 외골수 성격을 고치게 됐다”고 했다. 공부에 자신감이 생긴 정씨는 간호학과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 현재 영남이공대 간호학과 겸임교수다. 2009년부터는 ‘위대한 저서’ 토론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신득렬씨는 “인문학 공부 모임에서 토론식 수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임에 나와 몇 마디라도 하고 가는 걸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중의 다양한 관심에 따라 관련 강좌도 잘게 나눠지고 있다. 2001년 설립된 온라인 인문학 사이트 ‘아트앤스터디’에는 문학·사진·음악·미술·역사 등에 걸쳐 모두 350여 개의 강좌가 있다. 이곳 현준만 대표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전문적인 예술론부터 비틀스·혜은이까지 대중이 관심 있는 주제를 적극 강좌로 개발한다”고 했다. 아트앤스터디 회원은 2007년 3만2000명에서 올해 8만9000명으로 늘었다.

 토론식 수업은 기존 인문학 공부 모임으로도 확산된다. 인문학공동체 ‘수유 너머’는 2000년에 결성된 이 분야 1세대다. 지금은 ‘수유너머N’ ‘수유너머R’ ‘감이당’ 등으로 분화됐다. 수유너머N의 최진석 대표는 “인문학 대중화가 목적이었는데 어느새 일방적 강의에 치우쳤다는 반성이 들었다. 그래서 34년 전부터 토론식 수업, 청중 참여 요소를 강화했다”고 말했다. 토론문을 작성하거나 발표를 시키는 식이다.

 전문연구자들이 시민교육 영역으로 넘어오는 데 대한 우려의 시각도 있다. 제도권에서 수용할 수 없는 박사급 전공자가 남아돌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부산의 인문학 연구기관인 필로아트랩의 이지훈(47) 대표는 “대학의 인문학 관련학과 통폐합 바람 때문에 머지 않아 연구자 전체 숫자가 크게 줄 수 있다”며 “대학에서든 시민 영역에서든 인문학 연구자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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