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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조선 최고 문장가 연암 '글쓰기는 싸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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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필 지음
돌베개,304쪽
1만3000원

‘시작이 반’이란 말은 글쓰기에도 해당한다. 『이방인』의 작가 카뮈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라는 첫 문장을 끄집어내고서야 소설을 써내려 갈 수 있었다. 명문장가도 종종 ‘백지(白紙)의 공포’에 부닥치는 법. 펜을 들어 흰 종이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도 하얗게 비는 것이다.

 글쓰기가 무(無)에서 유(有)를,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비유되는 이유다. 그래서 ‘사랑은 차가운 불꽃’이라거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짚어낸 형용과 묘사의 대가 셰익스피어도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고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은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만”이라고 한다. 바로 ‘사의(寫意)’인데, 뜻을 쏟아낸다는 의미이다. 멋지게 쓰겠다며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을 붙여봐야 실질에서 더욱 멀어진다는 것이다. 연암이야 조선 최고의 글솜씨이니 그렇지 범인(凡人)에겐 가당하기나 한가.

 저자는 그래서 아예 연암을 본보기로 삼았다. ‘열하일기(熱河日記)’ ‘호질(虎叱)’은 물론 각종 편지까지 분석해 이 책을 꾸렸다. 연암은 자연 속에 글쓰기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봤다. 자연은 ‘글자화되지 않고, 쓰여지지 않은 문장(不字不書之文)’이라 했다.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관찰하고, 그 태도와 몸짓을 옮겨내는 것이 이상적인 글쓰기란 얘기다.

 연암의 관심사는 ‘지금, 여기’였다. 가장 참된 것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물이라 했다. 또 현실을 직시하고, 불합리와 맞서지 않으면 글쓰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도 했다. ‘아프게도, 가렵게도 못하는 글은 대체 어디에 쓰겠는가(과정록·過庭錄)’라고 지적한다. ‘허생전’ ‘호질’ ‘양반전’이 대표적이다.

 연암은 글쓰기를 전략으로 비유했다. “글자는 군사이고, 글의 뜻은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보루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을, 구절을 모아 문장을 만드는 것은 대오(隊伍)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과 문채(文彩)는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날리는 것과 같다(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연암의 저작에서 글쓰기 과정을 추출해 낸다. 먼저 관찰하기로 시작해 사물과 교감하기-자료 모으기-제목 정하기-협력적 글쓰기-수정하기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글쓰기의 요령으로 첫 머리에서 논지를 분명히 하고, 장면을 초점화하며, 관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여전히 어렵지만, 조선 최고의 문장가를 사숙(私淑)하면 글쓰기가 좀 나아질까.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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