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수의 세상탐사] 골목대장 전성시대는 이제 그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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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당시 68세) 전 일본 총리를 만난 건 1992년 여름이었다. 2년간 총리를 지낸 뒤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자민당 최대 파벌의 보스였다. 도쿄 도심의 허름한 건물 2층에 10평(약 33㎡) 남짓 되는 개인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한·일 간에는 독도·과거사·종군위안부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키 1m65㎝가량인 다케시타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날카로웠다. 한·일 기자교류 차원에서 방일한 덕택인지 30분가량 시간을 내주었다. 서울에서 간 기자 10여 명이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펼쳤지만 ‘한·일 신시대의 협력’이란 미사여구로 즉답을 피해나갔다. 어느 일본 기자가 전날 밤 “한 시간을 얘기해도 기삿거리 한 줄 안 나오는 관료 출신”이라고 귀띔해준 말이 실감났다. 그로부터 다양한 경제·외교 현안과 정치적 수사(修辭)를 들으며 거물(巨物) 정치인이 구사하는 말의 무게와 신중함을 실감한 게 망외의 소득이었다.

 다케시타 전 총리의 얼굴이 떠오른 건 한·일 정치인들의 막말 공방과 진흙탕 싸움 때문이다. 민주당 원내대변인이던 홍익표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쏟아놓은 귀태(鬼胎) 막말 파문 뒤에도 여야 정치인들의 독설과 ‘증오 발언’은 멈출 줄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 정치판을 휩쓸던 군화와 각목이 ‘막말 탄(彈)’으로 부활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오늘 참의원 선거를 치를 일본에서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해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 같은 망언족(族)이 득세한다.

 98년 2월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뒤 서울에서 만난 어느 일본 기자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조만간 ‘거물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유를 두 가지로 댔다. 하나는 3김(金)시대의 종언이고 다른 하나는 소선거구제였다. 94년 일본이 중의원(전체 480석) 선거에서 중선거구제 대신 소선거구제를 도입한 이후 정치인의 리더십·정책비전보다 대중적 이미지와 스킨십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 지도자를 키우는 데 소선거구제는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에서도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인 88년 총선 때부터 소선거구제를 채택해 왔다. 소선거구제는 ‘3김 시대’를 확대 재생산한 버팀목이었다. 영·호남 지역대결 구도와 맞물려 정파 대립을 확대시켰고 이는 선거전의 동력으로 활용됐다.

요즘도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기초의회 의원까지 공천권을 쥔 계파 보스에게 줄을 서는 것은 기본이고, 밤낮 없이 지역구를 누비는 골목정치에 허덕이는 게 현실이다. 지방 출신 의원들은 ‘금귀월래(金歸月來·금요일부터 지역구를 뛰다 월요일엔 여의도로 돌아온다는 뜻)’를 금과옥조로 삼는다.

그들이 국가 차원에서 정책비전을 갖고 ‘큰 정치’를 구상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경제 회생, 복지 확대, 교육 개혁, 남북 문제 등 워낙 시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어서다. 각 분야에서 기대를 받고 정계에 들어간 전문가 그룹조차 무기력하다. 툭하면 ‘돌격대원’이 돼 전투력을 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선거의 공천에서 물 먹기 십상이다.

 ‘귀태’ 막말 파문의 주인공인 홍익표 의원은 요즘 득실 계산이 한창일지 모른다. 초선 의원임에도 막말 한 방으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으니 말이다. 어느 야당 정치인이 일찍이 “부고(訃告)가 아니라면 내 이름이 나오는 어떤 기사도 환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야 정쟁의 한복판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격분케 할 발언을 했으니 잘하면 ‘저격수’라는 별명도 얻음직하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것이다. 말의 품격에 따라 후대의 평가를 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6년 10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성환 당시 신민당 의원이 좋은 사례다. 그는 면책특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9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유성환’이란 이름은 지금도 용기 있는 정치인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면 그런 수준의 발언 한마디쯤 남겨야 할 것 아닌가.

 제65주년 제헌절을 계기로 곳곳에서 개헌론이 무성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와 함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손봐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골목정치에 목을 매는 현실에서, 국가 경영을 맡을 거물 정치인이 나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역대결 구도의 단맛을 25년간 즐겼으면 이쯤 해서 선거구제를 바꿔 보는 게 어떨까. 정치권에 남아 있는 ‘함량 미달자’들의 교체를 위해서.

이양수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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