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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구하고 떠난 태안의 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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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사설 해병대 캠프 사고로 숨진 공주사대부고 2학년 이준형군의 책상에 19일 구광조 교사가 조화를 놓고 있다. [공주=프리랜서 김성태], [유튜브 캡처]
사진은 지난해 학교 합창대회에 참가해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는 준형군. ‘여유있게 걷게 친구’를 반주했다. [공주=프리랜서 김성태], [유튜브 캡처]

18일 오후 5시 충남 태안 안면읍 백사장 해수욕장. 초속 6~8m의 거센 남서풍이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고는 1~1.5m, 날씨는 흐렸다. “뒤로 조금만 더 물러나봐.” 사설 해병대 캠프(해병대리더십교육센터) 소속 이모(37) 교관의 다그치는 소리에 김유종(17·공주사대부고 2년)군은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그 순간 갯벌에 발이 빠졌다. 파도가 들이닥쳤다. 바닷물이 눈과 코와 귀로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이렇게 죽나 보다”라며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그의 팔을 잡고 해안가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던 발이 땅에 닿자 살았구나 싶었다. 친구들은 김군에게 “준형이가 너를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같은 반 친구인 이준형(17)군이었다. 김군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찾아나섰다. 헛수고였다. 여러 명의 친구들을 구한 뒤 그는 파도에 휩쓸려갔다.

 김군은 19일 “당시 80명의 학생이 바다에 8열 종대로 열을 맞춰 섰고 나는 해안에서 가장 먼 줄에 있었다”며 “준형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군의 친한 학교 선배였던 윤모(19)군은 “덩치가 큰 준형이는 공부도 잘했지만 수영도 잘했다. 학교폭력 현장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싸움을 말리고 갈 정도로 정의로운 후배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준형군은 지난해 교내 합창대회에서는 1학년 4반 반주를 맡았다. 반이 학년 1등, 전체 동상을 차지하는 데 주역일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사고 당시 학생들은 노 젓기 훈련을 마치고 쉬고 있었다. 다음 순서 훈련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구명조끼를 벗어 주고서였다. 그때 이 교관이 “전부 바다로 들어가!”라고 외쳤다. 학생들은 “기합을 받는가 보다” 하며 바다로 향했다. 김군은 바다로 들어갈수록 겁에 질렸다. 작은 키를 원망하며 옆에 선 친구 팔을 붙들고 버텼다. “더 들어와봐, 더”라는 교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 친구가 휘청했다. 잔잔하던 물살이 한순간에 휘몰아치며 커다란 파도가 덮쳐왔다. 앞에 있던 친구들 23명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자 바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간신히 빠져나온 김한솔(17)군도 “다들 정신없이 빠져나오기 바빴다”며 “교관들도 당황했는지 호루라기만 불 뿐이었다”고 울먹였다.

 교관들은 해변에서 인원 파악을 했다. 5명이 사라진 것을 안 순간 낯빛이 변했다. 오후 5시20분에야 안면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태안경찰서 상황실에 보고된 시간은 34분. 40분에 해경이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다. 교관들은 “자체 노력을 통해 18명을 구했다”고 해명했다. 오후 6시부터 회식차 인근 횟집에 모여 있던 교사 10여 명은 10분 뒤 전화를 받고 밥 한술 뜨지도 못한 채 현장으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였을까? 19일 오전 6시5분. 물이 빠져나가며 바닥이 드러나자 준형군도 자취를 드러냈다. 5분 뒤 진우석(17)군의 시신도 발견됐다. 태안보건의료원 상례원의 안치실에서 아들을 본 준형군의 어머니는 “왜 아직도 우리 아이의 몸에서 피가 흐르느냐”며 오열했다.

 오후 4시30분쯤 망망대해의 물이 다시 빠지기 시작하면서 잠수부 42명이 총동원된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46분 김동환(17)군이 발견된 데 이어 58분 장태인(17)군의 시신도 모습을 드러냈다. 울다 그쳤다를 반복해 목이 쉬어버린 동환군의 어머니는 “구명조끼만 입혔어도…”라는 말을 쉼 없이 반복했다. 이날 오전 “선생님들은 다 앉아서 뭐하고 있었느냐”며 교장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바닷가 쪽으로 끌고 갔던 태인군의 삼촌도 더 이상은 움직일 힘이 없는 듯했다.

 ◆공주사대부고생 5명 모두 사망= 7시15분. 해경 헬기의 시야에 이병학(17)군이 포착됐다. 준형군과 함께 친구들 구조에 앞장섰던 병학군이 마지막으로 가족 품에 안기면서 수색 활동은 종료됐다. 5명의 아이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간 검은 바다의 하얀 백사장은 빛을 잃었다. 193명의 친구들이 돌아간 공주는 울음소리로 뒤덮였다.

태안=신진호·민경원 기자 손승민 인턴기자(항공대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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