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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끝내고 화합의 연주 … 꽃향기 마을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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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충남 태안 갈두천 인근 마을 농부들로 구성된 ‘갈두천 보컬 그룹’. 기타를 치켜든 폼은 록 그룹의 그것이지만 사운드는 조금 어설펐다. 앞줄 오른쪽부터 가재현(65)·조항진(53)·박원철(57)·구봉기(52)·김해창(60)·박지현(33)씨다. 홍일점 박지현씨는 연주 지도자 겸 멤버로 특별히 영입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0일 오후 2시 충남 태안 원북면 대기리 마을 커뮤니티센터. “디딩딩딩.” 전기기타와 ‘쿵작쿵작’ 드럼 소리가 울렸다. ‘갈두천 보컬 그룹’의 연습 시간이다. 이날 첫 연습곡은 1980년대 그룹 ‘신촌블루스’의 ‘골목길’. 연주와 노래는 시작 30초 만에 멈췄다.

 “형님, 한 박자 늦잖아유.”(박원철·57·드럼)

 “미안하구먼. 나일(나이를) 먹으니 손꼬락(손가락)이 안 움직여서 그랴.”(가재현·65·리드기타)

 멤버들 옷차림은 독특했다. 논일 하다 말고 온 듯 밀짚모자에 장화를 신은 멤버도 있다. 실제 이들은 인근 마을 50~60대 농부다. 그룹 멤버는 모두 9명. 원북면 7개 마을에서 모였다. 한때 서로 등을 돌렸던 마을들이다. 반목을 해소하고 화합을 하면서 보컬 그룹까지 만들게 됐다. 정부 돈 수십억원을 받아 체험시설을 꾸미고도 방문객 발길을 좀체 잡지 못했던 마을들은 올해 체험 사업과 특산품 판매 등으로 3억5000만원의 가외 소득을 꿈꾸게 됐다. 갈두천은 태안에서 발원해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약 16㎞의 하천. 주변에 대기1·2리, 양산1·2리, 장대1·2리, 청산2리 7개 마을이 ‘갈두천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지원시설 유치 갈등, 끝장토론 뒤 합심

 권역은 한때 똘똘 뭉쳤다. 2009년 당시 농림수산식품부가 지원하는 ‘농촌마을 종합개발’ 대상으로 선정되기 위해서였다. 갈두천 권역은 특산물 사업, 갯벌 체험장 등을 내세워 선정됐다. 정부가 주민들의 참여 의지를 확인하는 현장 설명회 때는 200명 가까이가 모여 열기를 보여줬다. 결국 갈두천 권역은 5년간 70억원을 지원받게 됐다.

 그게 갈등의 씨앗일 줄이야. 어느 마을엔 10억원 넘는 시설이 세워지고, 어느 마을엔 5억원짜리가 들어서게 됐다. 당연히 불만이 생겼다. 종내에는 권역 개발사업 회의를 할 때 드잡이질을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사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꾸며 놓은 체험시설은 거의 공치다시피 했다.

 보다 못해 정부와 한국농어촌공사가 나섰다. 지난해 11월 마을 리더와 부녀회원 약 30명을 한 리조트로 데려가 2박3일간 ‘현장 포럼’을 열었다. ‘판도라의 상자’란 것을 만들어 모두 불만을 적어 넣게 했다. 농어촌공사가 불만들을 정리한 뒤, 하나하나 들어 가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함께 토론하게 했다. 처음엔 불만의 대상이 된 쪽에서 “누가 그런 내용을 적었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적어 낸 인물이 일어서서 “여러분 기신(계신) 자리니 차근차근 이야기하겄구먼유”라며 이유를 설명했다. 참석한 다른 마을 주민들을 의식해서인지 다툼이 아니라 자기 주장에 대한 설득이 오갔다. 포럼을 진행했던 농어촌공사 서산·태안지사 지역개발팀 임종덕(50) 과장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토론이 이어지며 서로를 이해하더니 권역 전체가 발전할 새 계획을 함께 짜자는 합의까지 이뤄지더군요.”

배꽃·복사꽃 체험농원에 인성학교도

 의기투합한 주민들은 외지인이 오지 않는 이유부터 살폈다. 아무 데서나 하는 ‘갯벌 체험’ 같은 것을 “나도 하겠다”고 나선 게 문제였다. 마을의 특색을 살린 새 사업을 찾아 2013년부터 나올 지원금을 여기에 쓴다는 방침을 세웠다. 4월엔 배꽃, 5월엔 복사꽃이 만발하는 과수단지를 관광·체험 농원화하기로 했다. 화력·태양광 발전소 일대를 에너지 체험 학습장으로 꾸미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 사업들은 201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각 마을 50~60대 농부 밴드도 결성

 초·중·고생들이 며칠 머물며 자연 학습과 농촌 체험, 정신 수양을 하는 ‘농촌인성학교’ 사업은 이미 시동을 걸었다. 2박3일 일정으로 지난 15일에 온 서울 하나고 교사와 학생 41명이 인성학교 첫 손님이 됐다.

 지난달엔 체험 사업과 특산물 판매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주민들이 5900만원을 공동 출자해 협동조합을 세웠다. 이를 통해 올해 인성학교, 체험 사업과 특산물 판매로 3억50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는 목표다.

 한편에서 화합의 상징으로 ‘갈두천 보컬 그룹’을 만들게 됐다. 소싯적에 악기 좀 다뤄봤다는 주민들이 모였다. 첫 공연 계획도 세웠다. 올 추석에 고향을 찾아온 귀성객들이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갈두천 권역의 조원호(74)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 추진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 모질래(모자라) 악기를 초등핵교서 빌려 쓰는디, 아들이(어린이들이) 고장 날까봐 싫어한다는구먼유. 우리 꺼이 하나 있으면 좋겄는디….”

태안=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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