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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26> 국정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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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권호 기자

여야가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지난 2일부터 국정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국정원이 지난 대선 기간 인터넷 댓글을 통해 정치에 개입했느냐를 놓고 양측이 지루하게 맞선 끝에 시작한 국정조사입니다. 8월 15일까지 45일간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경찰의 축소 수사 의혹, 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인권 침해 논란의 진상을 규명하게 됩니다. 국정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며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권호 기자

국정조사는 말 그대로 “국회가 특정한 국정의 일에 대하여 직접 행하는 조사”(국립국어원)를 의미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국회가 현장을 방문하거나 청문회·공청회 등을 열어 직접 조사를 하는 행위다. 입법부인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다양한 수단 중 하나로, 우리 헌법은 제헌 당시부터 국회의 국정조사 권한을 명문화해두었다.

 #17세기 영국서 시작, 우리는 제헌의회부터

 인류 역사상 입법부의 국정조사가 처음 발동한 것은 1689년 영국에서다.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왕권 견제 수단을 확보한 영국 의회는 이듬해 아일랜드 전쟁에서의 패전 원인을 조사하고 책임소재를 규명하고자 특별위원회를 꾸려 활동했다. 국정조사권이 최초로 헌법에 명문화된 것은 1919년 8월 11일 제정된 독일공화국의 바이마르 헌법이다. 제2차 대전 이후 일본도 이를 명문화했다.

 독일과 일본의 헌법을 참조한 우리 정부의 제헌헌법도 국정조사를 명문화했다. 제헌헌법 제43조는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제출케 하며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감사’라는 용어를 썼지만, 당시 현행과 같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국정감사’의 행태가 정착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이는 곧 국정조사를 의미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다만 이때는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정립한 규정이나 피감기관의 의무 등이 명확하지 않아 그 실효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로, 결의문을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국정조사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중단됐다. 증인 출석 요구 등은 사라지고, 행정기관에 보고와 서류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축소됐다.

 1980년 정치적 유화책을 내놓으며 들어선 전두환 정부 때 변화가 생겼다. 제5공화국 헌법(8차 개정헌법)은 “국회는 특정한 국정사안에 관해 조사할 수 있으며, 그에 직접 관련된 서류의 제출, 증인의 출석과 증언이나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며 국정조사권을 부활시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국정조사 요구→상임위원회 결정 또는 조사특별위원회 구성→조사계획서 본회의 승인→조사위원회 활동→조사결과보고서 본회의 채택 및 정부 이송’이라는 프로세스의 확립이다.

 현행 제도는 2000년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으로 발의 요건이 기존의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에서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으로 완화됐다.

 #역대 주요 국정조사

한때 국정조사 청문회는 스타 정치인의 산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무명의 초선 의원이던 그는 청문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사진은 1988년 11월 열린 5공비리 특위의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증인석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모습. [중앙포토]

 ‘의회의 대 정부 견제’라는 게 국정조사의 본질이지만, 민주화 이전 결과물은 ‘결의안 채택’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 제13대 국회(1988년 5월 30일~1992년 5월 29일) 때부터 국정조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그런 만큼 이때 열린 청문회는 역대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렸다. 13대 국회의 국정조사 4건 중 핵심 2건은 다음과 같다.

최근 들어 용두사미격의 국정조사가 잦아졌다. 우리 사회가 비교적 투명해지면서 이렇다할 폭로나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는 게 어려워지면서다. 사진은 2011년 8월 열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에 나온 당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숙의하는 모습. [중앙포토]

 ①‘제5공화국에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김윤환 의원 등 186명이 요구해 결과보고서가 채택됐다. 대통령 전용시설에 대한 현장조사와 일해재단의 경리장부를 들여다보는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리에 초점을 맞춘 국정조사였다. 조사 특위는 ‘새세대 육영회·심장재단’ ‘오대양 사건’ ‘삼청교육대’ ‘국제그룹 처리’ 등 4개 소위원회로 구성돼 활동했다. 의욕적으로 국정조사가 시작됐지만, 조사상 제약 등으로 구체적인 조치 요구 없이 의견 제시에 그쳤다.

 ②‘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1988년 6월 국회 운영위원장이 요구해 활동을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던지는 장면으로 유명한 바로 그 청문회다. 모두 34차례의 회의를 통해 18회의 청문회가 열렸다. 한·미관계소위와 자료검증소위, 현장검증소위, 특별법제정 및 사후대책소위 등을 구성해 활동했지만, 결과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불출석과 국회 모욕(동행명령 거부)죄로 고발됐지만 무혐의 처분됐다.

 13대 국회 이후 국정조사는 더 활발해졌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12·12사건 쿠데타, 율곡비리, 평화의 댐 건설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등 귀에 익은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가 많았다. 그러나 여야의 극심한 정쟁의 결과로 정치 공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한 경우도 다수다. 이후의 주요 국정조사는 이렇다.

 ③‘IMF 환란 원인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15대)=역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 열린 국정조사로, 1997년 말 IMF 사태를 추궁하기 위한 성격의 국정조사였다. 한화갑·구천서 의원 등 의원 115명의 국정조사 요구서와 박희태 의원 등 136명의 국정조사요구서가 따로 제출돼 1999년 1월 특위가 구성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등 5명의 참고인이 불출석 등을 이유로 고발됐지만 기소유예나 중지, 또는 무혐의 처분됐다.

 ④‘한국조폐공사 파업유도 진상조사’(15대)=1998년의 “조폐공사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검찰이 유도했다”고 한 진형구 전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발언으로 시작된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 1999년 7월 국정조사 특위가 구성돼 8~9월 21일간 국정조사가 진행됐다. 여야 간 일부 문구에 대한 이견으로 국정조사 보고서는 채택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 검찰총장의 부인 등 5명이 위증혐의로 고발돼 전원이 기소됐고, 이 가운데 3명이 징역1년의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⑤‘이라크 내 테러집단에 의한 한국인 피살 사건 관련 진상조사’(17대)=이른바 김선일씨 피살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로, 여야 합의에 따라 2004년 천정배·김덕룡 의원 등 298명이 요구했다. 외교부의 늑장 대응 논란, 재외국민 보호 및 테러 방지 체제 점검 등을 위한 국정조사였다. 당시 특위는 “김선일씨 피랍 및 살해 사건은 정부 외교안보시스템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사례”라고 결론지었다.

 ⑥‘저축은행 비리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18대)=부산저축은행 등 저축은행의 영업정지 및 부실대출, 영업정지를 전후한 불법인출 등에 대한 국정조사로, 여야 합의에 따라 2011년 6월 의원 288명의 요구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7~8월에 걸쳐 21일간 조사가 진행됐지만, 핵심 증인에 대한 여야 간의 이견으로 청문회는 열지 못했다. 다만 저축은행 부실 발생의 원인과 문제점 등에 대한 보고서는 채택됐다.

 #한계와 개선 방안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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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조사는 의회가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임에는 틀림없다. 독일·프랑스·미국·일본 등이 우리와 유사한 국정조사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잖은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국정조사가 정쟁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안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협상 대상이다. 특히 야권은 원내 주요 현안을 협의할 때 특정 사안에 대한 국정조사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19대 국회에서도 진주의료원 폐쇄에 따른 공공의료 정상화 국정조사가 여야 협상 항목으로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절차상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비록 국회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 발의 시 국정조사 절차가 시작된다고는 하나 조사계획서가 본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본격적으로 가동된다는 점에서 과반 정당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란 점이다. 실제 국정조사 요구 대비 실시 현황을 살펴 보면 14대 국회에선 80%(5건 요구, 4건 시행)이었으나 15대(26.1%, 23건 중 6건), 16대(17.6%, 17건 중 3건), 17대(16.7%, 12건 중 2건), 18대(18.8%, 16건 중 3건)에서는 20% 안팎에 머물렀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국정조사 요구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국회의 위상과 기능이 강화되는 추세에 비춰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외에 ▶조사위원 및 국회의원 보좌진의 전문성 미흡 ▶증인 신청과 출석 및 증언 확보의 어려움 ▶자료확보 미흡과 정부에 대한 지나친 의존 ▶회의식 조사 방식에 따른 일회성·폭로성 질의 빈발 등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도 활발하게 논의돼 왔다. 국정조사 요구의 처리시한을 설정해야 한다는 게 대표적이다. 이를 테면 여야 간 대립으로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정조사 요구서가 제출된 후 2주 이내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위원회 구성 후 2주 내에 조사계획서를 본회의에 제출하도록 하는 식이다. 현재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과반수 의결을 얻어야 채택되는 조사계획서의 정족수를 완화하자는 제안도 있다. 이 경우 국정조사가 무차별적으로 남발될 것이란 우려가 있는데, 특정 정책이나 정부 사업으로 국정조사 대상을 한정하는 안이 보완책으로 제시된다. 이 밖에 ▶국정조사 활성화를 위해 국회 상임위가 소관 분야 관련 사안에 국정조사를 할 수 있게 하고 ▶국정조사 특위 임기가 끝나더라도 정부의 처리 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소관 상임위에서 권한을 넘겨받도록 하는 방안 등도 논의되고 있다.

<참고자료>

‘국정조사제도의 활성화를 통한 국회의 기능강화방안연구’(2012, 국가발전연구원)

‘국정감사 및 조사제도의 현황과 개선방안’(2010, 국회 입법조사처 현안보고서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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