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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주의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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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에겐 자유주의라는 용어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익숙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건국이념으로 제도화된 것이 자유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새 정부 수립과 함께 성인 남녀 누구나 1인1표의 투표권을 가지며 국민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서구에서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거쳐 시민들이 참정권을 확보해간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위로부터 자유와 평등이 한꺼번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직 양반과 상놈의 습속이 남아 있던 65년 전의 현실에서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자유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이 잇따른 독재 정치로 인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전격적 제도화는 나중의 비판적 시각과는 별개로 평가돼야 할 건국사의 팩트다.

 국가 정체성의 뿌리가 자유민주주의였음에도 자유주의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 간 충돌의 영향이 크다. 기득권 세력이 내세우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폄하됐다.

  그런 가운데 60~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이념의 하나로 자유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국가 정체성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그 국가에 대한 저항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공존했다. 지배 이념이면서 동시에 저항 이념이라는 양면성은 한국형 자유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본래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가 종합적으로 재조명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가 이념의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부터다. 87년 남한의 민주화가 이뤄진 데 이어, 90년 세계적 냉전의 장막이 걷힌 이후다. 90년대 후반부터 서구 자유주의 이념의 구체적인 내용 소개가 확산됐다. 개화기 이래 한국 자유주의 수용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출발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옥균·박영효·유길준·윤치호·서재필 등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서구의 자유주의가 처음 수용되었다. 개인·자유·권리와 같은 자유주의 핵심 용어가 번역돼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화파가 받아들인 것은 서양에서 개인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자유를 확보해간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 아니었다. 개화파 지식인들의 목표는 부국강병 비결을 배우는 것이었다. 서양의 힘의 근원을 자유주의로 파악했다. 당시 전제군주제에서 벗어나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본이 자유주의를 이해한 경로와 비슷했다.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부강을 우선으로 여겼다.

 개화파의 자유주의 운동과 근대화 시도는 대한제국이 1910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며 좌절된다. 자유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반제국주의 독립운동 이념의 하나로 명맥을 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주의 노선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독립운동시기 자유주의는 크게 보아 민족주의 틀 안에 포함되었다. 국가 없는 식민지 시대에 자유주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가 다시 주요 이념으로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다. 이승만·김성수·송진우 등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 세력들이 반공산주의와 함께 내세운 이념이 자유주의였다. 개화기에서부터 선보인 한국형 자유주의의 특징은 대한민국 건국기에서도 반복된다. 개인의 자유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자유와 부강이었던 것이다.

 ◆참고 문헌=『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문지영 지음, 2011), 『개화기 자유주의의 수용과 그 정치적 함의』(김석근 논문, 2011)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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