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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철호의 시시각각

방사능 괴담과 NLL 대화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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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는 여야의 당쟁과 우리 사회의 관음증이 뒤엉킨 사안이다. 굳이 판도라 상자를 열지 않아도 그 결과는 대충 짐작된다. 여론조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NLL 포기는 아니다’고 보는 응답자가 53%나 된다(한국갤럽). 하지만 그 발언이 적절했느냐를 따지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태반이 ‘잘못됐다’고 본다(모노리서치). NLL 포기는 아닐지 몰라도, 부적절한 발언으로 보는 게 대세다.

 대화록이 공개된들 이런 판도가 뒤집어질 것 같지 않다. 진실 대신 해석 공방만 난무할 분위기다. 서로 유리한 대목만 골라 핏대를 세울 게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친노 진영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대선 불복을 시도하는 느낌이다. 촛불시위가 터져야 비주류로 몰락한 판세를 뒤엎을 수 있다. 친박 강경파는 이에 대한 물타기로 NLL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당쟁에는 원리주의가 판치기 마련이다. 양쪽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여야의 온건파는 실종됐다. 상식과 합리성도 사라졌다. 과연 무조건 파헤치고 까고 보는 게 옳을까.

 2011년 가을, 서울 월계동 도로에서 방사능이 검출됐다. 즉시 원자력안전기술 요원들이 현장에 투입됐다. 정밀 선량계에는 연간 허용량(1mSv)에 훨씬 못 미치는 시간당 0.0014mSv의 방사능이 나왔다. 하루 1시간씩 1년간 서 있어도 연간 허용선량의 절반에 불과했다. 긴급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원자력위원회는 “정밀조사를 거친 뒤 철거 방식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노원구청은 이 지침을 무시했다. 환경단체들이 연일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선포하라”고 들볶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사능 때문에 세 번이나 유산했다”며 울부짖는 주민들까지 구청에 몰려들었다. 구청장은 곧바로 포클레인을 몰고가 아스팔트를 몽땅 걷어내 버렸다. “주민 불안감 해소가 우선”이라는 명분은 근사했다. 내심 6개월 뒤의 구청장 선거도 의식했는지 모른다.

 그 대가는 값비쌌다. 원자력위원회는 800t이 넘는 폐기물 더미에서 방사능 오염 물질과 멀쩡한 아스팔트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리했다. 분류작업은 마들 체육공원→노원구청 공터→옛 공영주차장으로 옮겨다니며 힘겹게 진행됐다. 결국 경주 방폐장에 가기까지 무려 7개월의 시간과 70억원의 비용이 들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측은 “정밀 조사를 통해 오염된 부분만 걷어냈으면 7억원도 안 들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1년 뒤 경기도 의왕시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의왕시 도로에 원자로 폐기물이 들어갔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KBS는 현장 영상을 내보내며 “일반 도로의 두 배나 되는 방사능이 검출됐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의왕시장은 침착했다. 우선 원자력위원회에 손을 내밀었다. 가장 정밀한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의 선량계가 현장에 투입됐다. 막상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일반 도로와 똑같은 수치가 나온 것이다.

 의왕시는 TV 뉴스에 나온 도로 4곳을 모조리 굴착해 공개했다. 모두 순환골재(재활용)가 아닌 혼합골재(자연형)가 쓰였음을 눈으로 확인시켰다. 의왕시는 원자로 폐기물 처리 과정도 정밀하게 역추적했다. 결국 야당 의원의 국감자료가 엉터리로 밝혀졌다. 그러면 왜 KBS 선량계에는 높은 수치가 나왔을까? 원자력위원회는 “간이 선량계는 조작 숙련도에 따라 오차 범위가 매우 넓게 나타난다”며 말을 아꼈다.

 과연 NLL 공방이 월계동의 재판이 될지, 아니면 의왕시의 지혜를 따를지 궁금하다. 다만 여야 강경파가 정밀 진단도 없이 무작정 아스팔트부터 걷어내고 보자는 게 겁난다. 당쟁에 피곤해지는 쪽은 국민들이다. 판도라 상자에서 희망이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친노와 친박 강경파만 서로 차지하려 난리를 필 게 분명하다. 산더미 같은 대화록 폐기물을 일일이 분류하는 값비싼 비용은 우리 사회의 몫이고….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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