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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만델라의 숨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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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용서하되 잊지 말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 변호사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는 흑인들을 설득한 말이다. 만델라 자신이 백인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기에 그의 설득은 힘이 있었다. 성공회의 투투 대주교도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신념으로 만델라를 적극 지지했다. 마지막 백인 대통령으로 만델라와 함께 흑인통치 시대를 연 데클레르크는 만델라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내려앉았다.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감옥의 독방에 갇힌 27년의 한(恨), 그 원통함에 어찌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뜻밖에도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는 전례 없는 국가기구를 만들어 흑백 화해의 새 역사를 써내려갔다.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대사면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정치적 이유도, 현실적 타산도 있었겠지만 만델라의 신념과 결단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10% 남짓한 백인이 90%에 가까운 유색인종을 가혹하게 탄압해온 342년간의 백인우월주의는 보복이 아닌 용서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사면권은 모름지기 이렇게 쓰는 법이다.

 당연히 만델라는 데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는다. 그러나 그것은 만델라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벨상의 영광이었다. 만델라의 이름이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름으로써 노벨상의 권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것은 상이 아니라 경이로운 관용의 인격 앞에 헌정된 존경의 표시였다. 유엔은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선포했다.

 죄를 자백한다고 곧바로 용서해주는 법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자백이나 자수는 벌을 가볍게 해주는 ‘임의적 형벌 감면 사유’일 뿐이다(형법 제52조). 그러나 만델라 정부는 과오를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형벌을 면제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자백이 ‘필요적 형벌 면제 사유’가 된 것이다. 백인들은 죄를 지어 한 번, 용서를 받아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양심의 빚을 지게 됐다. 그래서 용서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라는 이름의 법정에서 가해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 용서를 선고했다. “진실을 고백하라. 그러면 용서하겠다.” 이것이 만델라가 풀어낸 ‘사랑과 정의의 방정식’이다.

 이런 법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신의 법정이다.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용서의 은총으로 응답한다(요한1서 1장). 참회 없으면 용서도 없다.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헤픈 관용은 신보다 더 관대한 상급법정을 설치하는 것이다. 참회가 가해자의 돌이킴이라면 용서는 피해자의 돌이킴이다. 쌍방의 돌이킴에서 새로운 평화가 싹튼다. 참회와 용서, 그것이 신의 정의요 하나님의 평화다. ‘용서받지 못한 죄’보다 ‘용서하지 않는 죄’가 더 무겁다. 하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신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그 하늘의 씨앗을 인간의 땅에 심었다. 만델라의 신념에는 ‘진실을 외면한 눈먼 용서’도 없었거니와 ‘용서를 모르는 무자비한 정의’도 없었다. 이 관용과 평화의 정신을 아프리카인들은 우분투(Ubuntu)라고 부른다. 만델라는 우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여행자가 마을에 들르면 주민들이 음식을 차려주었다. 여행자는 음식이나 물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 우분투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공동체가 더 나아지게 하려고 그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네 옛적에도 해 저문 길녘의 나그네가 웬만큼 살 만한 집 대문 앞에 이르러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치면, 집주인은 나그네를 사랑방에 맞아들이고 따뜻한 밥상까지 차려 내오곤 했다. 인간애와 공동체정신, 이것이 우분투의 지혜요 이 땅의 옛 어른들이 지녔던 상생의 열린 마음이며,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관용과 배려의 성찰이다. 만델라는 저 옛적의 지혜와 성찰로 흑백 갈등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연임을 마다하고 5년 단임으로 권력의 자리를 물러났다.

 ‘타타 마디바(존경하는 아버지)’로 불리는 만델라가 95번째 생일을 앞두고 폐 감염증으로 위독한 상태다. 남아공은 물론 온 지구촌이 근심에 잠겨 있다. 아, 만델라의 자리는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가. 나는 감사한다. 지난날 인도에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저 남아프리카에 넬슨 만델라라는 고결한 영혼이 숨 쉬고 있음을. 나는 기도한다. 그 우분투의 숨결이 우리 곁에 좀 더 머물러 주기를.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