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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경찰서엔 시인 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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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자연을 담아 서정시를 쓰는 남병근 서울 영등포경찰서장(왼쪽)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형사의 언어로 현대시를 쓰는 고석종 마약수사팀장. [김상선 기자]

집회로 뜨거웠던 지난달 24일 서울 여의도. 함성 속에 현장을 지키던 남병근(55) 영등포경찰서장이 나직이 시를 읊조린다. 직접 지은 시다.

 “민초들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쇳소리 구호에 확성기는 찢어지고/ 성난 아우성은 여의도 하늘을 덮는다.”

 시위자들과 대치 상황이 길어지자 경찰들도 함께 격앙됐다. 남 서장은 그날 녹초가 돼 경찰서로 돌아온 후배 경찰들에게 자신의 시 ‘묘(妙)한게 없어’를 읽어줬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만큼 묘한 사람 없다는 시 내용대로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집회에 나선 아픈 국민을 보호하면서도 법과 균형을 지키는 게 경찰의 소명이죠. 정제된 시는 제게 균형을 잃지 않게 해줬습니다.”

 24년차 경찰인 그는 시인으론 4년차다. 2010년 월간 ‘문예사조’를 통해 시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의 시 40여 편은 대부분 서정시다. 경기도 양주시 하패리에서 난 남 서장은 함께 자란 자연을 주로 시에 담았다. 시인의 꿈은 2009년 초임 경찰서장으로 간 충남 보령에서 피었다. 남 서장은 “폐암 말기였던 어머니와 관사에 들깨·고추 등을 심고 산 기억은 시상의 원천이었다”고 떠올렸다. ‘들깨꽃’ 등이 대표작이다.

 그는 “서정시가 준 맑은 기운이 정성 치안의 바탕이 됐다”며 “4대 악과 민생 범죄도 이로써 다스릴 수 있단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보령에 근무하던 2010년엔 교통 사망사고를 60% 줄였다. 2011년 경기 평택경찰서장 때부턴 순찰시 집마다 순찰카드를 남겨 주민과 소통했다.

 남 서장에게 영등포서엔 ‘시인 선배’가 있다. 고석종(58) 마약수사팀장이다. 20여 년 간 마약수사 현장을 누빈 고 팀장은 2003년 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먼저 등단했다. 그의 시엔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직설적인 형사의 언어가 묻어난다. “다신 마약을 하지 않겠다 해놓고 또 손대는 피폐한 영혼과의 대화였달까요.”

 형사 수첩과 같이 끼고 다니는 시상 노트엔 마약 중독자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담겼다. ‘백색가루’ 시리즈에선 ‘비늘잎의 증류수 0.03mg’, 히로뽕에 취하는 과정을 그렸다. 시 ‘전자총’ 등엔 병든 마약범의 세상이 있다. 그는 “먼지를 뽕가루라며 줍는가 하면 전자총 환청에 부산에서 자수하러 온 마약범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시는 곧 수사다. 그는 “사물을 완전히 파악해 시를 쓰는 것처럼 수사도 단서를 파헤쳐 전말을 알아내는 창작의 과정”이라고 밝혔다.

글=이지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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