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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 잘한 결단 ‘집안 뿌리’ OB맥주 판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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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2면

“최고경영자(CEO)가 고뇌에 찬 결단을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경영이라는 것은 ‘냉철한 숫자 싸움’인데 감성적으로 결단을 내리면 그 조직은 어떻게 되겠나. 어떤 CEO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며 기도를 한 뒤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한다고 한다. 매우 위험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결단의 순간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두산중공업 회장,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중앙대학교 이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는 박용성(73·사진) 회장의 말이다. 그는 CEO의 결단을 색다르게 정의한다. 한마디로 CEO의 결단은 ‘대안선택(Alternative)’이라는 시각이다. YES, NO를 결정하는 것이 결단이 아니라는 얘기다. 경영상 의사결정할 사안이 중대하면 경영컨설턴트, 회계사, 변호사 등을 다 동원해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심지어 노무사의 의견까지 들은 뒤 판단을 내려야 하는 복잡한 세상이다.

“사전에 실무자들이 조사·연구를 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안들 중에 CEO가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맥주가 없으니 소주를 마시자고 결정하는 게 의사결정이 아니다. 요즘은 야구감독도 통계 숫자를 놓고 결단을 한다.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복잡한데 CEO 한 명의 경험이나 직감으로 판단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1896년 서울 종로의 ‘박승직 상점’을 모태로 한 국내 최고(最古) 기업인 두산그룹이 꼭 100년이 되던 1996년. 당시 두산그룹을 이끌던 박 회장은 수익구조가 급속도로 악화돼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가 말하는 ‘인생 최악의 결단’을 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나는 장밋빛 전망치를 기준 삼아서 경영을 하면 안 된다는 쓰라린 경험이 있다. 어떤 조직이나 예산을 짜거나 투자를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90년대 중반은 호황기였다. 내년에는 9%의 경제성장을 한다고 가정하고 예산을 짜고 투자를 했다. 그런 식으로 하니 경영계획을 보면 적자가 나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도 무리하게 투자를 했다. 공장을 여기저기 마구 지었다. 기업인이 가장 속 터지는 게 뭔지 아는가. 물건이 안 팔려도 속이 쓰리지만,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게 더 속이 쓰리다. 장밋빛 예상치만 기준 삼아 공장을 무리하게 증축했다. 그 후유증으로 외환위기 직전인 90년 중반 이후 두산이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30대 그룹 중 부채비율로 따지면 26등일 정도로 나타났다.”

“그룹 망한 뒤 OB맥주가 무슨 소용이냐”
박 회장은 우선 경영진단부터 하기로 했다. 당시는 대학교수의 경영컨설턴트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박 회장은 교수의 조언 방식보다 외국의 전문 컨설팅회사인 맥킨지에 맡겼다.

맥킨지의 두산그룹 컨설팅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금 흐름상 몇 개월 내(내년 3월)에 부도가 날 수 있다. 주력 기업인 OB맥주까지 파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OB맥주를 팔지 않는 방법, 50% 지분만 파는 방법, 100%를 다 파는 방법이 있다. 이런 컨설팅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수할 수밖에 없다’.

OB맥주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남겨준 두산의 뿌리 기업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게 어떤 기업인데”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감상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기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은 현금 흐름이라는 숫자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만에 두산이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박 회장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큰형님인 박용곤 명예회장에게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고 가족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남겨주신 기업이니 최종적으로는 큰형님이 결정하세요.”

박용곤 명예회장은 “그렇다면 다 팔아라. 그룹이 망한 뒤 OB맥주가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두산은 OB맥주 지분 50%를 벨기에의 인터브루(인베브의 전신)에 매각했다. 3M, 코닥, 네슬레의 지분도 처분했다. 29개 계열사를 23개로 축소해 현금을 확보했다.

“현금을 확보한 뒤 ‘하수구 구멍’부터 막았다. 하수도 구멍을 막아야 물이 고일 것이기 때문이다(빚을 먼저 갚았다는 얘기다). 비싼 이자 등이 새어나가지 않자 그제야 돈이 고이기 시작했다.”

두산이 위기를 넘기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외환위기가 닥쳤다. 30대 그룹 중 18개가 쓰러질 정도였다. 박 회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단으로 손꼽는 이유다.

이후 박 회장은 구조조정을 통한 위기 탈출에 그치지 않고 그룹을 변신시켰다.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식음료 등 소비재 중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중공업 기업으로 도약했다. 98년 3조원 수준이던 그룹 매출은 현재 26조원이 넘는다.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할 때는 일부에서 “두산이 질렀다”는 말이 나왔다.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아니냐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당시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그런 소리를 못할 것이라고 했다.

“대우종합기계를 1조8000억원대에 인수했다. 그 금액은 2년치 영업이익을 더 얹어 주고 산 합리적인 수치였다. 당시 사업 다각화를 위해 대우종합기계를 꼭 사고 싶었다. 마지막 결심을 입찰 마감일 아침 11시쯤에 했다. 밤새 고뇌에 찬 결심을 하지 않았다. 숫자만 믿었다.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면 의사결정은 어렵지 않다. 그런 뜻에서 내 방에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글귀의 액자가 있다.”

그는 명절 등에 손자·손녀들까지 데리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할아버지·아버지 산소를 자주 찾는다고 했다.

“산소에 가서도 OB맥주를 팔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은 없다. ‘제가 벌초도 하지 못하고 산소 관리도 못하는 죄인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이렇게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오지 않습니까. 3대, 4대째 그룹을 잘 성장시키지 않았습니까’라고 한다.”
 
뜻밖의 대한체육회장 연임 포기 결정
체육계 안팎에선 박 회장이 대한체육회장 연임을 포기한 것을 두고 뜻밖의 결정이란 말이 많았다. 대한체육회장은 국내 ‘스포츠 대통령’으로 통하는 체육계 권력의 핵심이다. 박 회장의 연임에 걸림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성공을 이끌고 지난해 런던 여름올림픽에서 원정 사상 최고 성적(종합5위)을 거두는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며 연임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 회장은 “공수신퇴(功遂身退·임무를 완수했으니 몸이 떠난다)”라는 노자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퇴임 당일 인터뷰에선 “섭섭시원하다”는 말로 감회를 압축했다. 아쉬움이 좀 더 앞선다는 뜻으로 읽혔다. 굳이 그런 결심을 한 이유는 뭘까.

박 회장은 ▶나이(73세)가 있으니 은퇴할 때가 됐다 ▶연임에 대한 부인의 반대가 컸다는 점을 공식 이유로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런던 올림픽 이후 단임으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임덕이 싫어서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런던 올림픽 이후라는 타이밍에서 결단의 배경을 엿볼 수 있다.

런던 올림픽은 박 회장에게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1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종합 5위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독도 세리머니를 펼쳐 동메달 수여가 보류된 박종우 선수 ▶경기 시간 측정 오류로 메달을 따지 못한 펜싱의 신아람 선수 사태 등 악재가 겹쳤다. 이 과정에서 박 회장은 국제 규범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악플의 대상이 됐다. 당시 열세 살 손녀딸이 “그래도 전 할아버지를 믿어요”라며 응원 문자를 보냈을 정도였다.

귀국 후엔 박종우 선수 건으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출석해 “일본에 왜 저자세 굴욕 외교를 하느냐”는 국회의원들 앞에 수차례 서야 했다. 체육계 사정에 밝은 인사는 “스포츠 외교 사안을 정치적 억지 논리로 접근하는 모습에 박 회장이 스트레스를 상당히 많이 받았다. 연임 포기 결단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 회장은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한 적이 결코 없다. 국제 스포츠외교의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했기에 박종우 선수의 동메달도 되찾을 수 있었다. 국제펜싱연맹은 관련 규정을 고쳐 ‘제2의 신아람’이 나오지 않도록 했다. 지금도 당시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후임으론 자신의 ‘복심’으로 불리는 김정행 전 대한유도회장을 적극 지원해 당선시켰다. 체육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김 회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인 국제관계 분야에서는 김 회장을 조용히 돕고 있다. 지난 5월 러시아에서 열린 세계스포츠단체들의 연례 회의 ‘스포트어코드 컨벤션’에서 눈에 띄지 않는 지원활동을 펼친 후 조용히 회의장을 떠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운동이라곤 걷는 게 전부”라는 박 회장이지만 체육계와의 인연은 깊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해 82년 대한유도회 부회장으로 체육계에 발을 들인 후 30년 넘게 국제스포츠계 마당발로 활약했다.

체육회장으로선 2009년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하며 내걸었던 공약을 지켰다는 게 자랑이다. “남아공 더반 IOC총회에서 평창올림픽 유치에 실패할 경우 내 시체를 화물칸에 싣고 가라”는 각오로 임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외에도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통합으로 조직 효율화 ▶진천선수촌 사업 ▶체육회관 건립 등 꿈을 이뤘다는 게 그의 소회다. 그 과정에서도 체육회 예산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박 회장은 “취임 후 체육회 예산은 10원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체육회 법인카드를 받자 그 자리에서 잘라버렸다.

박용성 회장의 취미는 야생화 촬영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찍은 야생화 사진들로 달력도 제작한다.

취미 삼박자 - 기차·카메라·야생화
어릴 적 꿈은 기차 기관사였다. 지금도 틈만 나면 기차를 탄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기차여행을 많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호언할 정도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물론 베트남이며 유럽 일대를 철도로 누볐다. 기차 창밖으로 세상 풍물 보는 재미는 그가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낙이다. 그의 손엔 항상 카메라가 들려 있다. 고등학교 때 선친에게 카메라를 선물받은 후 사진은 오랜 취미가 됐다. 그가 렌즈에 담기 좋아하는 대상은 야생화. 방방곡곡을 다니며 찍은 야생화로 달력을 제작할 정도다. 2008년엔 희귀 야생화인 ‘변산바람꽃’을 촬영하기 위해 통통배를 타고 인천에서 영흥도로 출동하기도 했다. 산비탈에 누워 있는 5cm 꽃을 찍기 위해 1시간 동안 바닥에 엎드려 촬영했다.

그는 결단을 내릴 땐 냉철한 숫자를 근거로 해야 하지만 삶에선 여유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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