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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자리이타, 지리산에서 행복을 노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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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원규
시인

지난 주말 하동군 최참판댁에서 초여름 밤의 잔치 한마당이 벌어졌다.

 ‘지리산학교 & 지리산행복학교’ 문화제에 참가한 300여 명이 서로 ‘사람의 향기’를 나누었다. 지리산 원주민과 귀농·귀촌인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도 먼 길을 달려왔다. 갓난아기에서부터 70대까지 나이·성별 등의 구별 없이 오로지 ‘학생의 이름’으로, 모두가 ‘지행교(지리산행복학교)의 교주’가 되어 노래하고 춤추고 공부했다.

 길놀이와 놀이판 ‘들뫼’의 북춤으로 시작된 문화제는 ‘지리산행복밴드’ 공연, 울산 시노래패 ‘울림’과 시인들의 콘서트, ‘지리산 바람패’의 춤과 다양한 장르의 장기자랑 등으로 이어졌다. 출연진이나 관객 모두 이미 감동할 준비가 돼 있으니 목소리며 눈짓, 손짓 하나에도 경쾌하게 반응했다. 작은 실수마저 준비된 연출로 받아들이고, 야외공연장에 쏟아지는 밤비마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는 소품에 불과했다.

 마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신경림 선생의 시처럼. 아니, 이를 넘어 잘나고 못나고의 경계가 사라지고 무대와 객석 모두가 출연자이자 연출자가 되었다.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참가자 모두가 준비하고 청소하는, 그 모두가 초청자이자 초대자였다.

 어째서 이런 축제가 가능할까. 그 답은 너무나 간명하다. ‘행복’이라는 실체적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모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부분집합보다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교집합의 세계가 훨씬 더 넓고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따로 또 같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력은 순전히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만든 ‘지리산학교’에 있다. 어느새 5년차를 맞은 ‘지리산학교 & 지리산행복학교’와 하동·구례·남원의 지역학교 등 네 개의 학교로 거듭나며 여전히 실험 중이다. 이를 벤치마킹한 한라산학교 등 전국 곳곳에서 독립적으로 다양한 모습의 싹이 트고 있다.

 지역 주민과 도시인들이 ‘지행교’의 학생으로 인터넷 카페를 통해 등록한다. ‘열린 학교’이자 ‘움직이는 학교’로서 특정한 건물도 없이 지리산과 섬진강 그 모두가 신노마드(nomad)적인 교실이며 학교다. 운영방식도 쉽게 합의되지 않는 것들은 일단 보류해 왔다. 사실 공통분모를 실천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천천히 내실을 기하는 것이 소중하니 뭐 그리 급할 게 있겠는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선생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선생이 되면서도 스스럼없는 수평적인 관계, 별 가진 것 없어도 부끄럽지 않고 서로 행복해지는 관계가 이 척박한 시대에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녹차·야생화·글쓰기·아웃도어·커피·몸만들기·요리·미술·그림여행·산행·전래놀이·지리산이야기·귀농 등을 배우고 가르친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어울려 전국의 다양한 ‘친구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석 달에 한 번쯤 모이는 전체수업이나 매월의 반별 수업에 참가해도 그 비용은 최소한이다. 예를 들면 수업료는 1인당 1만원 정도, 숙식비는 2만원 정도이니 3만원 안팎으로 공부하고 더불어 술도 마시고 지리산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 ‘나눔의 미학’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각자 음식들을 가져와 나눠먹는 ‘냉장고 비우기’는 언제나 각양각색의 요리로 대성황이었다. 밥 먹고 술도 마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따로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 고통과 불행은 길고 기쁨과 행복의 순간은 짧다지만, ‘누구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인디언 모호크족 추장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며, 진형준 교수가 말하는 ‘톨레랑스보다 더 적극적인 덕목의 하나인 역지사지’가 날마다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희생이나 강요, 혹은 손익분기점에 너무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롭되 남에게도 이로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은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 행복한 길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너무나 짧다.

이원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