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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겨울, 연둣빛 봄이 공존하는 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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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호 08면

1 프린스 윌리엄 해협에서 만난 하늘빛보다 푸른 유빙. 멀리 보이는 컬럼비아 대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39북극의 눈물39이다.

‘광활하다’‘웅장하다’란 표현을 많이 써왔지만 알래스카의 창공을 날아보고 나니 그전 것은 다 무효다. 비좁은 비행기 창문 너머로 무한대로 펼쳐진 순백의 산봉우리들은 그저 신의 영역이다. 구름을 뚫고 솟은 봉우리들이 눈과 구름의 경계를 없애니 분명 구름 위를 날고 있지만 눈밭을 미끄러지는 기분이다. 설산을 벗어나 잠시 잘 정비된 시가지가 나오나 싶더니 다시 엄청난 스케일의 초목과 호수가 펼쳐진다. 마치 인간과 자연의 길항관계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물론 자연의 위력이 몇 수 위다.

버킷리스트 No.1, 알래스카

구름 위에서 본 인상으론 냉장고 속처럼 차가울 것 같지만, 알래스카의 대지는 인간의 기대를 간단히 저버리는 곳이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와 불과 며칠 전 내렸다는 눈더미가 공존하고 있다. 눈더미를 구석에 밀어놓은 채 신록이 순식간에 대지를 덮어버린 자연의 신비가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렇다. 많은 이들이 버킷 리스트로 꼽는 ‘알래스카에 간다는 것’은 이런 예측불허의 자연을 만나는 일이다.

2 해안도시 발데즈 항구에서 빙하크루즈 스탠 스티븐스(Stan Stephens)호를 타고 떠나는 프린스 윌리엄 해협 뱃놀이. 귀여운 해양동물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알래스카라 하면 ‘일년 내내 겨울 아냐?’ 오해들을 하지만 5월 말~9월 초는 남부럽지 않은 여름이다. ‘미드나이트 선’이라 부르는 백야 시즌이 시작돼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햇볕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알래스카의 현관 앵커리지는 한때 북미 쪽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대도시지만 고층 빌딩이 거의 없어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맥이 그대로 스카이라인이 되는 소박한 동네다. 대낮처럼 밝은 밤 9시가 넘어 다운타운의 식당에 들어가니 자리가 없을 정도다. 땅덩어리는 거대하지만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밤 11시쯤 돼야 겨우 석양이 지는 분위기다. 다운타운에서 10분쯤 걸어가니 바다가 나온다. 알래스카를 항해한 최초의 서양인 캡틴 쿡 동상이 자기 이름을 따서 지은 ‘쿡인렛’이라는 내해를 바라보고 있는 레졸루션 파크에 서니, 바다 건너 주홍빛 해가 그야말로 꼴깍 넘어가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다. 일부러 찾아간 것도 아닌데 평생 본 가장 아름다운 일몰이라고 할 만한 광경. 알래스카는 이런 사소한 발견의 기쁨이 도처에 넘쳐나는 곳이다.

3 발데즈 항구의 바닷바람은 초겨울만큼 쌀쌀하다.

매킨리산 만년설, 구름 위를 걷다
알래스카의 랜드마크는 뭐니 뭐니 해도 해발 6000m가 넘는 매킨리산이다. 많은 산악인들이 꿈꾸는 북미 최고봉으로 올해가 초등(初登) 100주년이란다. 등산기지 토키트나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알래스카 레일로드 기차에 올랐다. 대자연을 관통하는 기차 여행은 잠시도 창밖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천장까지 반투명 유리로 뚫려 시원하게 자연에 노출된 이 기차엔 한가하게 졸고 있는 손님이 없다. 드넓은 평원이나 늪지대가 펼쳐질 땐 특히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언제 커다란 뿔이 달린 무스(moose)나 곰이 나타날지 모른다. 객석 어디선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기 무스가 숲으로 돌진하고 있어!” 외치면 승객들은 하나가 된다.

토키트나는 골드러시 시대 개척자들의 거점으로 쓰였던 역사적인 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약 800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다운타운에는 개척 당시 건물 수십 채가 보존되고 있어 지금도 19~20세기 초반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악인이 아니고서야 매킨리에 오르려면 날아오를 수밖에. 다운타운 근처 비행장에서 딱 10명이 타는 앙증맞은 빨간색 비행기에 오르면, 새싹이 막 돋아난 푸른 초원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수에 눈 덮인 험준한 산맥까지, 엄청난 스케일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진한 초콜릿 케이크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듬뿍 발린 듯한 만년설 코팅 산봉우리들을 한참 지나니 사진으로만 보던 매킨리 정상이 위용을 드러낸다. 구름을 숄처럼 살짝 두른 채 좀처럼 몸매를 속 시원히 노출하지 않는 것이, 고만고만한 봉우리들과는 포스가 사뭇 다르다. 여기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산악인들의 마음을 비행기 안에서 헤아리긴 어려웠지만 정상 코밑의 눈밭에 내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만년설에 발자국을 찍어보니 만분의 일쯤은 알 것도 같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게 이런 걸까. 한 발짝 뗄 때마다 발이 30㎝쯤 푹신하게 들어간다. 은빛 설원의 한복판에서 만년설 한 움큼을 뭉쳐봤다. 찹쌀 경단처럼 차지게 뭉쳐져 반짝반짝 은가루를 뿌린 듯 빛이 났다. 주머니에 넣어 가져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일행에게 던지니 아프단다. 역시 내공 있는 만년설이다. 눈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영영 녹지 않겠다.

눈 덮인 매킨리산에서 영원한 겨울을 맛봤다면, 토키트나 호수를 둘러싼 숲 속의 하이킹은 약동하는 봄의 생명력을 생생히 맛볼 수 있다.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양서류가 서식하는 곳이라는 이 호수는 입구부터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나른한 개구리 울음소리로 손님을 맞는다.

사흘 전만 해도 온통 브라운이었다는 숲 속은 금방 돋아난 연둣빛 신록 천지다. 두릅고사리 등 친숙한 먹거리도 막 돋아나고 있다. 어린 두릅을 뜯어 맛을 보니 집에서 먹던 그 맛이다. 곰이 좋아하는 블루베리도 꽃망울이 맺혔다. 2주만 지나면 수풀이 허리까지 자라 헤치고 다녀야 한다니, ‘미드나이트 선’의 위력이 이 정도다. 비밀처럼 흐르는 줄 알았던 계절을 햇살 한 줌이 거짓말처럼 바꿔 버리는 것이다. ‘여기가 알래스카야 아프리카야’ 싶게 더운 낮 기온에 지난 주말 눈이 4인치나 내렸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호수 한쪽 응달에는 눈의 흔적이 선명했다.

무스를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웠다. 훈남 가이드 하워드가 “어제는 갓 태어난 새끼를 거느린 무스를 봤는데 새끼를 낳은 무스는 공격적이라 주의해야 한다”며 잔뜩 기대를 부풀렸지만 결국 5㎞를 돌면서 만난 건 우리를 피해 금방 지나간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선명한 발자국뿐이었다.

4 토키트나 호수를 한 바퀴 돌며 초록 봄기운에 흠뻑 젖어드는 숲 속 하이킹.

해양동물 만나는 재미 쏠쏠한 빙하크루즈
지구를 덮쳐오는 쓰나미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한 해안 빙하는 알래스카의 대명사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가장 박력 넘치는 컬럼비아 대빙하를 만나려면 추가치 산맥과 키나이 반도에 둘러싸인 프린스 윌리엄 해협에 배를 띄워야 한다. 얼음의 바다인 프린스 윌리엄 해협은 해안도시 발데즈에 면해 있다. 어업과 석유 산업이 발달한 발데즈 역시 인구 3500명쯤 되는 작은 도시. 주민들은 시골마을의 이웃사촌처럼 정감이 넘친다. 발데즈 뮤지엄의 직원 패티가 “스타벅스보다 커피가 더 맛있는 가게”라며 안내한 카페의 주인장은 “친구 사이에…” 하며 커피값을 사양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인심 아닌가!

이 마을의 연중 최대 행사는 누가 더 큰 광어를 잡는지 겨루는 ‘할리벗 더비’. 작년엔 10대 소녀가 우승을 했단다. 이곳 사람들은 시장에서 생선을 거의 사지 않고 직접 낚시로 잡는다니, 자연의 터전이 웅장한 만큼 인간의 삶은 아기자기할 수 있는 건가 보다.

항구로 나가니 바닷바람만큼은 초겨울이다. 크루즈에 올라 무려 7시간의 항해에 나선다. 빙하도 빙하지만 이 뱃놀이의 묘미는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해양 동물들의 재롱.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한가롭게 배영 중인 해달 11마리. 가까이 접근하니 귀여운 얼굴로 꼬리를 살랑이다 이내 흩어진다. 알래스카엔 곰이 발에 차일 만큼 많다지만 이번 여행에 유일하게 곰을 만난 것도 배 위에서다. “저기 검은 점 보이나요? 움직이고 있네요”라는 선장의 안내에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바다를 둘러싼 가파른 절벽, 나무가 깎여 내려간 풀밭 사이로 흑곰이 어슬렁대고 있다.

두어 시간 깊숙이 들어가니 점점 바다에 얼음 덩어리들이 많아지고 멀찍이 대빙하가 존재를 드러낸다.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바싹 접근하길 기대했지만 유빙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지구 온난화로 대빙하는 하루 20~30m씩 후퇴하고 바다에 떠다니는 유빙만 점점 늘어난다니, 이게 바로 북극의 눈물 방울들이 아닌가 싶다. 몇몇 거물급 유빙은 해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단다. 수만 년의 저편에서 밀려온 기암괴석 모양의 거대한 얼음들이 시리도록 푸른 빛으로 세월의 무게를 증명하고 있다. 빙하가 푸른 이유는 눈이 오랫동안 쌓이고 눌리는 과정에서 푸른 빛만 표면에 남기기 때문이라니, 푸를수록 내공 있는 빙하가 맞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머리독수리 두 마리가 비행 실력을 겨루고, 혹등고래와 범고래가 쌍으로 재주를 넘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선장 앨런도 “이런 광경은 항해 인생 20여 년 만에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돌출된 바위 언덕 위에 널브러져 일광욕 중인 바다사자 수백 마리도 잊기 힘든 풍경이다. 물개 모양인데 왜 ‘사자’라고 할까 늘 궁금했는데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으르렁거리는 소음이 사자의 그것과 꼭 닮은 것이다.

5 알래스카 레일로드 관광열차(Alaska Railroad Denali Star Train)는 스워드부터 페어뱅크스까지 알래스카의 주요 관광지를 종단하며 대자연을 관통하는 2층짜리 기차다. 6 헬리콥터 빙하 랜딩을 하기 위해 찾아간 거드우드. 동화책으로 들어온 듯 그림 같은 숲 속 마을이다. 7 프린스 윌리엄 해협에서 만난 바다사자 떼. 돌출된 바위에 드러누워 한가롭게 일광욕 중이다.

푸른 빙하 밟아보는 헬리콥터 빙하 랜딩
배 위에서 멀찍이 내다본 빙하가 영 아쉬워 빙하를 직접 밟아보기로 했다. 앵커리지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안고속도로 ‘스워드 하이웨이’를 타고 1시간 거리인 거드우드는 진정 곰 세 마리가 사는 집이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숲 속 마을. 실제로 길을 가다 곰을 만나는 일이 다반사란다. 이곳의 럭셔리 스키장 알리에스카 리조트는 바다를 내다보며 스키를 탈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명소이기도 하다.

마을 깊숙이 위치한 작은 비행장에서 헬리콥터를 띄워 추가치산맥 한복판 ‘트웬티마일 빙하’에 내렸다. 오랜 세월 흘러내린 눈이 물결치는 모양으로 다져진 ‘빙하 파도’와 그것이 녹아서 고인 ‘빙하 호수’의 풍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현장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다른 별에 간다면 이렇지 않을까, 사방의 얼음과 함께 시간도 얼어붙은 것 같다.

푸른 얼음에 발을 딛고 여기저기 고여 있는 옹달샘에 손을 담가 본다. 하늘빛을 그대로 담은 옹달샘은 눈밭에 굴러다니는 보석 같다. 멀리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만 고요히 들려왔다. 주위엔 아무도 없고 인간의 흔적 또한 없다. 몇만 년 동안 다져진 얼음 위에 잠시 내려앉은 나는 얼마나 먼지 같은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머릿속도, 마음속도 깨끗해진다.

내려가는 길에 산양 두 마리를 발견하고 바싹 다가갔다. 야생에서 뛰노는 동물들을 비로소 가까이 만난 기쁨에 분주히 셔터를 누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평소엔 관심도 없던 것들을 애써 쫓고 있을까-. 대빙하에 점점 가까이 갈 수 없듯이 우리 삶에서 이런 생명들도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지. 왜 세상엔 인간만 넘쳐나고 동물들은 다 우리에 가둬 버렸을까. 이제 와서 다가가려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은 자꾸만 도망가는 것 같았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더니, 일상의 분주함을 멈추고 온 이곳에서 자연과 생명의 가치가 조금은 보였달까. 헬리콥터가 움직이면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져 버리는 동물들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내 잊혀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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