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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통신] 돈 안 내고 영화·음악 다운로드 스위스에서 불법 아닌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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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006년 스웨덴 해적당 출범 이후 각국은 이를 약간씩 변형한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왼쪽부터 스웨덴, 캐나다, 아이슬란드 해적당 로고. [중앙포토]

2006년 10월 말 어느 날 스페인인 J는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 홈페이지에 들어가 수상작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영화광인 그는 매년 시체스 영화제가 끝나면 수상작들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보는 게 습관이었죠. 그해엔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특수효과상을 받은 한국 영화 ‘The Host’. 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었습니다.

 J는 이 영화를 보고 놀랐습니다. ‘특수효과 기술이 스페인 영화보다 더 낫잖아!’ 내친김에 같은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을 본 이후론 아예 한국 영화만 찾아 보기 시작했죠. 그전까지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던 한국에 대해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2년 뒤 그는 업무와 관련해 서울에서 열리는 한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게 되자 망설임 없이 참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과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한글을 배웠고, 몇 년 뒤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요즘 J는 한국 역사 공부에 한창입니다.

 우연히 본 영화 한 편으로 한국과 이처럼 깊은 인연을 맺은 J는 다름 아닌 제 남편입니다. 직장 때문에 스위스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 영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여전하죠.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져 한국 영화를 찾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파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한국 영화 파일을 내려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겁니다. 입소문으로 전해 들은 최신 영화, 도저히 구할 길이 없습니다. 스마트TV를 마련하자마자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한국 영화를 찾았지만 목록에 뜨는 건 십수년 전 영화들뿐. 가까스로 합법 다운로드가 가능한 한국 인터넷 사이트(한국어로 돼 있으니 제가 찾는 걸 도와줘야 합니다)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발견하면, 이젠 자막이 문제입니다. 영어 자막 서비스가 안 되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관객 1000만 명을 모은 영화든,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든, 독립영화든 다 마찬가지 사정이죠.

 결국 남편은 불법 사이트에서 보고 싶은 영화들을 내려받습니다. 자막은 사이트 이용자들이 영어로 번역한 것 중 골라 쓰고요. 아이러니한 점은 돈을 지불하지 않고 다운로드하는 이 행위가 한국에선 불법이지만 스위스에선 합법이라는 겁니다. 스위스·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 중 상당수는 인터넷에서 돈을 내지 않고 영화·음악·게임 파일 등을 내려받는 행위를 합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반대로 업로드하는 건 불법입니다).

 한국 영화를 한국에서 공짜로 내려받으면 불법이고 스위스에선 합법이라는 이 모순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의 간극이기도 합니다. 스위스 정부가 최근 ‘불법 다운로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를 시행한 뒤 내놓은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공짜로 영화·음악 등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문화 상품을 구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쓴다’. 네덜란드 정부가 시행한 연구 결과도 비슷합니다. ‘공짜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한 사람들은 나중에 그 가수의 콘서트에 가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저작권’의 사전적 의미는 ‘창작물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권리’인데요, 이를 한국에선 ‘창작물에 주인 외에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권리’로, 유럽에선 ‘작품을 통해 창작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권리’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에게 물었습니다. 작품으로 돈 벌고자 하는 창작자와 그걸 돈 내고 보겠다는 소비자가 존재하는데 왜 그들을 연결해주는 합법적인 공간이 부족하냐고요. “불법 유통량이 너무 많아 이걸 정리하지 않고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생존이 불분명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한국 영화를 하나의 통합된 사이트에서 돈 내고 내려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기술이 아니라 영화계 인식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해적당(pirate party)’의 주장도 귀담아들어볼 만합니다. 2006년 스웨덴에서 최초로 생겨나 현재 30개 이상의 국가에서 공식 정당으로 등록돼 있는 해적당은 ‘인터넷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 저작권 철폐’를 외치는, 한마디로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를 옹호하는 정당입니다. ‘창작자도 소비자도 아닌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배만 불리는 저작권법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해적당의 질문에 IT 강국인 한국은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요.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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