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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모든 차표에는 시간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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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석구
성균관대 경제학과 2학년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시끌벅적한 술자리, 동아리를 왜 나가려 하느냐는 물음에 한참을 미소만 짓던 후배는 진지하게 세상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후 한참을,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곱씹어봤던 것 같다. 그 말에 어떠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이유 모를 세기말적 우울 속에서 산다. 밝고 가벼운 듯한 삶 아래엔 불신과 불안이 깃들어 있다. 그건 단순히 우리 사회의 경제가 요동쳐서도, 한병철 교수의 말대로 성과사회가 되어서만도 아닌 듯싶다. 그 이면엔 우리 사회가 벌이는 부조리극이 놓여 있다.

 1면 톱을 다툴 법한 내용의 기사들이 하루에도 두세 개씩 쏟아졌다. 상식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들이 옳지 않은 방법들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곧 잊었다. 그사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은근슬쩍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던졌다. 근 3개월 동안의 그 무수한 사건 중 유일하게 잘못을 인정했던 사람은, 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잘못이 없는 육군사관학교 교장밖에 없지 않았나.

 슬프게도 이 무책임한 부조리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다못해 대학생도 타인의 글을 베낀 것에 책임을 지는데, 신문이 다른 신문의 사설을 베끼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세피난처의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들이 드러났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회사에 200억원의 손해를 끼친 것에 책임을 물은 결과는 용역을 동원한 편집국의 폐쇄이고, 그 많은 유령회사의 사장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잘못은 눈에 보이는데,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젠 국가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려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사건마저도 책임지는 이 없이 잊혀지려 한다.

 학생들이 다시 시국선언을 하려 한다. 진지하게 사회에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것에도 침묵해서 사회에 관심이 없다던 이들이 다시 말을 건넨다. 무엇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아닌, 절망적 우울에서 비롯된 진지함에서 나온 물음이다. 그러나 뒤늦게 터져나온 질문에 슬프게도 책임져야 할 이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린 학생들보다 진지하지도 책임감도 없는 그들은 도통 보이질 않는다.

모든 차표에는 시간이 있다. 원칙과 상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불안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지금 오고 있는 이 차마저 놓친다면 앞으로 나가야 할 시간은 점점 더 지체될 것이다. 방학이 오는 지금 그 긴 휴식 동안 학생들은 언젠가 나갈 사회를 향한 청사진을 열심히 그릴 것이다. 사회, 우리가 모사할 그 대상이 계속 흐릿하다면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미래에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한석구 성균관대 경제학과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