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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89> 수서 사건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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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학재 국장 구속 땐 내가 신문 광고 통해 고발"

1990년 5월 10일 서울시는 건설부에 수서택지 특별분양 여부에 대한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건설부의 판단도 서울시와 같았다. ‘공영개발지구 내 토지 공급은 형평을 유지해야 한다. 국민주택청약 등 예금 가입자에게 불리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연합주택조합에 특별분양은 안 된다’는 간단한 내용의 회신을 서울시로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건설부 주택국장이 교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와대의 압력과 한보의 로비가 건설부로까지 미쳤다. 건설부의 입장은 ‘특별분양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1991년 2월 14일 수서택지 특혜 분양 사건에 연루된 여야 의원들이 조사를 받으러 당시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있던 대검찰청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시는 이제 홀로 맞서야 했다. 먼저 나는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통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김 국장은 신임 건설부 주택국장과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 다음 수서지구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이 ‘특별분양을 허가해 달라’고 올린 건의를 서울시 민원심사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했다. 위원회를 열어 주택조합 측의 의견을 들었다. 공개적으로 심사하는 과정을 거쳤고 ‘불가(不可)’ 결정이 내려졌다.

 정치권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여당은 당정협의기구를 통해 압력을 가했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은 총재 명의의 협조 공문까지 서울시에 보냈다.

 얼마 후 이모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장 한 명을 보낼 테니 얘기를 한 번 잘 들어보세요.”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시장실로 신모 법무부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의 학교 후배였다. 심각한 얼굴로 그는 나에게 말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시장님.”

 “뭐가 심각하다는 거요.”

 “지금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그대로 놔두면 곧 구속이 됩니다. 그걸 예방하려면 국장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후임은 아무개 국장으로 해주십시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일단 참았다.

 “내가 김학재를 도시계획국장으로 인선할 때는 그 사람이 청렴하고 생활이 검소하고 강직하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도시계획국장으로 와서 한 건 시장 지시에 의해서 한 거니까, 잘못이 있어 구속한다면 그건 내 잘못이오. 구속하려면 시장을 구속하시오.”

 그렇게 신 국장을 돌려보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시장실로 이동 종합건설본부장, 김학재 도시계획국장 등 신임하는 몇몇 간부를 불렀다. 법무부 국장이 찾아와 한 얘기를 전했다.

 “내가 거부해서 보냈으니까 혹시 김학재 국장을 구속하는 사건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옥쇄를 각오하고 저항하고 고발할 겁니다.”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다가 고발을 합니까. 검찰도 그렇게 나오는 마당에 말입니다.”

 “일간지에 내 돈으로 전면광고를 할 겁니다. 수서 사건이 이러저러하다고 사회 고발을 하는 겁니다. 나도 문안을 생각해 볼 테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1990년 9월 초 경기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장·차관 연수가 있었다.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모 법무부 장관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김학재 국장에 대해 얘기했다.

 “김 국장은 내가 인선할 때부터 고심한 청렴한 국장입니다.”

 어떤 압력이 있어도 서울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뜻을 그 말에 담았다. 우리 뒤에 안상영 부산시장이 마침 있었다. 안 시장은 서울시 기술직 공무원 출신으로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을 지냈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그였지만 내 말을 거들어줬다. “김학재요? 아, 내가 알죠. 그 사람 청렴한 거 내가 보증합니다.”

 검찰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90년 12월 27일 청와대는 개각을 발표했다. 나는 서울시장직에서 경질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수서택지 특혜 분양

1991년 1월 서울시가 한보그룹을 배후에 둔 주택조합에 수서지구 택지를 특혜 공급한 사건. 노태우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번졌다. 91년 특혜 분양 시비가 일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을 비롯해 여야 의원, 청와대 비서진, 건설부 공무원 등이 구속됐다. 4년 후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서 사건과 관련해 정 회장으로부터 수백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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