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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 스파이로, 좌익 사상범으로 … 이념 광풍에 스러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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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14면

광복을 따라온 검은 그림자
문화예술인이나 지식인들 중에 광복 이후 해방기의 좌우익 대립과 전쟁이 몰고 온 광풍에 삶이 훼손되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이육사·윤동주와 더불어 민족의 노래를 불렀던 많은 문인도 분단 때문에 서로 대척되는 지점에 서서 영원히 교류할 수 없는 사이가 되거나 그 대립의 희생자가 됐다. 유명세가 따른 작가일수록 쉽게 역사의 질곡에 갇혔다.

분단 경계지대의 문학인들

예를 들어 보자. 육사 사후인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을 편찬한 이는 동생 이원조였다. 30년대를 대표하는 평론가인 그는 해방기에 좌익 문인으로 활동하다 월북해 55년 임화 등과 함께 미제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해 옥사한다. 일설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그 역시 서울로 들어와 남한 지식인들을 심판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8년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여럿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뒷날 국문학자가 되는 후배 정병욱은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에 맞춰 출간하려고 엮은 시집 초본 세 권 중 유일한 한 권을 징병에 끌려가면서도 비밀리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광복 후에 공개했다. 이 초본에다 윤동주가 과거 일본에서 보낸 시편들을 새로 보태 시집 출간에 이르게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강처중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는 경향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당시 주필이던 정지용에게 윤동주 시를 보여준다. 정지용은 그것을 소개 글까지 얹어 신문에 게재했다. 한국 문학사에 윤동주라는 이름이 비로소 한 줄로 등재된 순간이었다.

육사 시집, 정지용 시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48년 1월 발간된 윤동주 시집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들어 있다. 이후 좌익 활동을 하다 잡혀 사형수가 된 강처중은 6·25 때 인공(人共) 치하에서 출감한 뒤 행방불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지용 또한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이원조가 포함된 조선문학가동맹의 권유에 따라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러 갔다가 체포된다. 그 이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북으로 끌려가다 그해 겨울 유엔군이 평양을 폭격할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의 이름과 작품은 월북작가로 분류돼 오래도록 금서 목록에 올랐고, 88년 해금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세상에서 숨겨졌다. 윤동주 시집 또한 각각 월북과 좌익으로 분류된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이 게재된 탓에 한동안 절판되고 말았다. 살아남아 광복의 기쁨을 누린 우리의 문학가들은 이렇듯 다시 혼돈에 늪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북으로 간 사람들
이원조처럼 해방기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월북한 문학인들은 대개 100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개는 20년대 후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약하던 문인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광복 후 우리 문단은 이 카프 세력이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8월 임화·김남천·이태준 등의 조선문학가건설본부(문건)가 결성된 데 이어 9월 이기영·한설야·한효·송영 등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문동)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다시 남로당의 뜻에 부응해 조선문학가동맹(45년 12월)으로 통합돼 보다 분명한 정치색을 드러내게 된다.

1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때 서울 워커힐 호텔만찬장에서 만난 백인준 북측 공연단장(왼쪽)과 현승종 민족통일중앙협회 의장이 만찬이 끝난 뒤 손을 잡고 걸어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2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왼쪽)가 1950년 8월 15일 평양 교외에서 8·15 경축단으로 온 중국 문인들인 저우양(왼쪽 둘째), 리리싼(셋째), 궈모뤄(넷째)와 함께 미군의 폭격을 피해 휴식하고 있다. 3 6·25 때 승리일보 주간으로 전선을 취재 중인 구상 시인(왼쪽에서 둘째). [중앙포토]

조선문학가동맹이 문건파의 주도로 활동을 펼치게 되자 문동파는 불만을 품고 45년 12월에서 이듬해 사이에 월북해 버리고 만다. 이때의 일을 제1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남쪽에 남은 문건파 문인들의 입지도 넓지 못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5), ‘철도 파업’(1946.9) 등을 주도한 이유로 수사의 표적이 된 남로당의 주축 세력이 월북했기 때문이다. 문건파의 월북은 대체로 47년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48년 8월) 때까지 일어나는데 이를 제2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평양을 방문한 소설가 홍명희가 북한에 잔류한 것도 이 무렵 일이다.

광복 후 임화 등에 이끌려 좌익 문인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이름을 빌려준 다수의 문인들은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좌익계열이 월북을 해버리자 조선문학가동맹을 해체하고 사상 전향을 한다. 이들은 대부분 좌익 혐의를 벗기 위해 정부가 조직한 국민보도연맹(1949년 10월 결성)에 가입해 신분 안정을 보장받는다. 6·25전쟁이 터지고 이승만 정부는 이틀 만에 대전으로 피란했다. 28일 아침 “동요하지 말라. 국군은 북진 중이고 유엔과 미군이 도와주러 온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복되는 라디오방송 목소리는 대전에서 녹음한 특별 발표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새벽에 정부는 한강 인도교와 세 개의 철교를 폭파시킨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전국에 흩어진 거의 30만 명에 육박하는 보도연맹 가입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상범으로 복역 중인 죄수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이른바 보도연맹사건이다.

이즈음 월북 문인들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월북 전 조선문학가동맹이 처음 자리했던 보신각 옆 한청빌딩 4층에 다시 사무실을 열었다. 일제 때부터 명망 있던 인사들, 살아남은 보도연맹 가입 문인들, 피란 못한 문화예술인들은 이들의 요구대로 사상교육을 받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새로 가입해야 했다. 반공(反共)에 적극적이었던 인사는 정치보위부로 넘겨졌다. 소설가 이광수는 서울에서 6·25를 맞았다. 7월 12일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며칠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9·28 수복 때 평양으로 압송된 그는 압록강 중류의 도시 만포에서 혹한에 시달리며 병을 앓다가 그해 10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평론가 김기진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폭행당해 초주검이 됐다가 살아났다. 정지용과 함께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선봉에 섰던 시인 김기림은 서울사범대 교수로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입구 쪽으로 오던 길에 한 청년에 의해 지프로 끌려갔다. 수필가 김진섭, 소설가 이석훈, 시인 김억·김동환, 평론가 박영희, 고려대 교수이자 시인 임학수 역시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이들은 모두 인민군 퇴각 때 북으로 끌려가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작가 박태원 등은 문학가동맹에 재가입해 월북의 수순을 밟았다. 이때의 일을 제3차 월북이라 할 수 있다.

월북문인들은 북한 문단에 편입돼 북한문학사 형성에 한몫을 담당한다. 그러나 다수는 김일성 체제 아래 숙청당해 횡사하거나 지방으로 하방(下放)돼 말년까지 구차한 생을 이어가야 했다. 초기 숙청 대상은 문동파의 견제를 받은 임화·이태준·이원조·김남천 등 문건파들이었다. 이들은 박헌영 등 남로당의 핵심들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무더기로 ‘미제 스파이’로 낙인찍히며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에 비해 이기영·한설야·송영 등 문동파의 핵심들은 김일성 체제 문예운동의 실천세력으로 북한에 안착한 편이었다. 이상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기수였던 박태원은 이태준과의 깊은 인연으로 월북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준 등은 일찌감치 숙청당하지만 그는 북에서 최고 소설로 평가받은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을 발표하면서 권력을 누렸다.
 
분단의 경계에서 질곡에 빠지다
소설가 박영준·박계주, 시인 김용호·유정·김수영 등은 피란을 가지 않고 있다가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끌려들어갔다. 이들은 매일같이 문동 사무실에 모여 사상 강좌를 들어야 했다.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의 ‘붉은 깃발’이라는 노래도 배웠다. ‘미제국주의 척결’ ‘이승만 도당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는 가두시위에도 나가야 했다. 9월 들어 문화공작대로 편성된 이들은 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미아리, 의정부, 임진강을 거쳐 북으로 실려 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거듭해 평양을 점령할 무렵 이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해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들을 반긴 것은 ‘인민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부역 혐의였다. 이 혐의는 이들이 종군작가단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수영은 좀 다른 경로로 귀환했다. 그는 탈출 과정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총살 위기에까지 처했다가 다시 도망쳤다. 하지만 서울에 와선 국군에 의해 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고 인민군으로 몰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그나마 영어 실력이 좋아 미군 군의관의 통역을 맡은 덕에 부산에서 풀려난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피란을 못 간 채 문동 사무실에 나가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교육을 받고 가두행진을 한 문인들 중 북으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은 또다시 부역죄로 고통을 겪는다. 그중 시인 노천명, 수필가 조경희는 각각 무기징역,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1·4 후퇴 때 수인(囚人) 복장으로 부산에 이감되었다. 이들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을 비롯해 모윤숙·조연현 등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에 힘입어 51년 4월 사면된다. 소설가 박노갑은 모교인 휘문고 재직 시절 이념투쟁이 싫어져 숙명여고로 자리를 옮긴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그는 9·28 수복 뒤 ‘빨리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뿌리치고 학교에 갔다가 부역 혐의로 구금되었다.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그는 다른 사상범과 함께 처단되고 만다.

남에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문인이 100명을 넘지만 북에 머물다가 견디지 못하고 남으로 넘어온 문인도 적지 않다. 시인 구상은 46년 『응향』 사건으로 인한 화(禍)를 피해 월남했고, 소설가 황순원도 토지개혁으로 집안이 몰락한 데다 시를 게재한 『관서 시인집』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자 견디지 못하고 월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김이석, 시인 박남수·함윤수·양명문, 아동문학가 장수철·김요섭, 수필가 원응서 등은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는 틈에 월남을 감행해 남한 문단으로 입성한다. 아동문학가 강소천, 나중에 소설가가 되는 최인훈·이호철 등은 흥남철수 때 미군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란 가는 데 성공한다. 1950년이란 시간은 한반도를 관통하면서 한국 문단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많은 작가가 죽음의 길을 걸었고 살아남은 이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제 우리는 여기 이렇게 그것을 증언함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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