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낳는 나노로봇이 머잖아 지구 점령?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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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처럼 새끼를 낳는 기계를 만들 수는 없을까. 자식을 낳는 기계, 곧 자기증식하는 기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해답을 내놓은 과학자는 헝가리 태생의 미국 컴퓨터 이론가인 존 폰 노이만(1903~1957)이다. 1948년 자기증식 자동자(self-reproducing automata) 이론을 발표했다. 자동자(自動子)는 본래 생물의 행동을 흉내 내는 자동기계를 뜻하였으나 컴퓨터의 출현으로 뇌처럼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폰 노이만의 자동자 이론을 요약하면, 자기증식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일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1) 먼저 자기증식 기계에 그 자신의 기술(description), 곧 첫 번째 기술을 제공한다. 부모기계에 자기가 만들어야 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2) 복제되어야 할 기계에 대한 기술, 곧 두 번째 기술을 자기증식 기계에 제공한다.
3) 자기증식 기계에 두 번째 기술의 기계와 정확하게 동일한 다른 기계를 구성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자기증식 기계가 자식 기계를 만든 뒤에는 이 명령을 복사하여 자식 기계에 전달하도록 지시한다.

폰 노이만의 자기증식 자동자 모델은 1953년에 발견된 디옥시리보 핵산(DNA) 분자 구조의 기능과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폰 노이만은 자기증식 기계의 기술 안에 포함된 정보가 반드시 두 종류의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자식 기계를 생산할 때 부모 기계가 실행해야 되는 명령으로 사용되며, 다른 한 번은 자식 기계에 부모 기계의 기술을 전달하기 위하여 복제되는 데이터로서 사용된다.

이는 분자생물학에서 유전이 성립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과 흡사하다. 생명의 본체인 DNA(유전자)로부터 생명의 현상인 단백질이 합성될 때 DNA 안의 유전 정보는 다른 방법으로 두 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유전 정보에 의해 단백질이 합성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또 한 번은 유전 정보를 아비로부터 자식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복제할 때 사용된다. 폰 노이만의 이론은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에 DNA 분자의 이중나선 구조가 발견되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실로 경이적인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자신의 자동자 이론에 만족하지 않았다. 3년 뒤인 1951년 세포 자동자(cellular automata)라고 명명된 새로운 자기증식 모델을 내놓았다. 바둑판처럼 생긴 격자 모양의 평면을 사용하는 이 모델에서는 자기증식하는 유기체가 네모난 칸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 모델을 세포자동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네모난 칸이 세포처럼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기본단위이고, 또한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그 수효를 증식시키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기복제 기능 가진 분자 기계, 어셈블러
1980년대부터 자기증식 기계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외계 행성으로 커다란 우주선 대신 자기증식 기능을 갖춘 초소형 로봇 탐사선을 보내는 방안을 검토했다. 1980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자기증식 우주선은 달 표면의 자원을 이용하여 복제품을 만들어내고, 그 숫자가 많아지면 힘을 합쳐 우주기지를 건설하고 다양한 탐사 임무도 수행한다.

1980년대 중반에 기계의 자기증식 기능을 연구하는 분야가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태동했다. 인공생명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고 1987년 9월에 이 학문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세미나를 주관한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인 크리스토퍼 랭턴에 따르면 인공생명은 ‘생명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행동을 보여주는 인공물의 연구’라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것 같은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장치의 개발을 겨냥하는 학문이다.

랭턴은 컴퓨터 화면 위에서 생명체처럼 증식을 거듭하는 세포자동자를 개발하기도 했다(그래픽). 폰 노이만이 자기증식 기계의 설계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지만 그것을 독립된 학문으로 발족시킨 사람은 랭턴이기 때문에, 폰 노이만이 인공생명의 아버지라면 랭턴은 그 산파역에 비유된다.

한편 나노기술 이론가 사이에 자기증식 기계의 개발 가능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뜨겁게 전개되었다. 1986년 나노기술의 전도사라 불리는 미국의 에릭 드렉슬러가 저서인 『창조의 엔진 (Engines of Creation)』에서 분자 어셈블러(assembler)의 개발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분자 어셈블러는 ‘원자들을 한 번에 조금씩 큰 분자의 표면에 부착시켜 거의 안정적인 형태로 원자들을 결합하는’ 나노기계이다. 이를테면 분자 어셈블러는 적절한 원자를 찾아내서 적절한 위치에 옮겨놓을 수 있는 분자 수준의 조립기계이다.

1991년 펴낸 『무한한 미래(Unbounding the Future)』에서 드렉슬러는 최초의 어셈블러가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나노기술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수의 어셈블러가 함께 작업하여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분자제조(molecular manufacturing) 개념을 내놓았다.

드렉슬러에 따르면 최초의 어셈블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자신과 똑같은 또 다른 어셈블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셈블러는 자기복제 기능을 가진 분자 기계인 셈이다.

어셈블러의 개념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리처드 스몰리(1943~2005)이다. 1985년 풀러렌(fullerene)을 발견한 공로로 1996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2001년 미국의 월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9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스몰리는 어셈블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무엇보다 드렉슬러의 어셈블러가 기능을 수행하려면 원자를 하나씩 집어 들고 원하는 위치에 삽입시키는 손가락(조작 장치)이 달려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손가락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나노로봇에 의해 제어되는 공간의 한 면이 1나노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디작은 장소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공간의 제약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어려움이 기본적으로 발생한다. 나는 이 문제를 하나는 ‘굵다란 손가락(fat fingers)’ 문제, 다른 하나는 ‘끈끈한 손가락(sticky fingers)’ 문제라고 부른다.”

스몰리와 드렉슬러의 나노기술 논쟁
스몰리는 어셈블러에 5~10개 정도의 손가락이 달려 있어야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만한 수의 손가락을 빽빽하게 달아놓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반박했다. 원자를 집어내거나 붙잡고 있는 조작 장치(손가락)는 원자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축소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셈블러가 작업을 하는 1나노미터 정도의 공간은 5~10개의 손가락을 모두 수용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뭉뚝한 손가락으로 작은 부품들을 하나씩 옮겨서 손목시계를 조립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어셈블러가 작업하는 공간의 크기에 비해 손가락이 너무 굵어서 분자 조립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스몰리는 어셈블러의 손가락이 끈끈한 것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원자들은 화학적으로 결합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자들이 일단 손가락에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원자를 원하는 자리에 위치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엿을 묻힌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조립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셈블러의 손가락으로 원자를 옮기는 작업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뜻이다.

스몰리의 노골적인 공격에 대해 드렉슬러가 가만 있을 리 만무하다. 2003년 드렉슬러는 어셈블러에 대한 스몰리의 비판에 대해 공개 답장 형식으로 반론을 폈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분자조립 기계인 리보솜(ribosome)을 예로 들면서 분자 어셈블러가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리보솜은 세포 안에서 유전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원료)으로 제품(단백질)을 만드는 나노기계이다. 2003년 두 사람은 세 차례 더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논쟁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스몰리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드렉슬러의 분자 어셈블러 개념을 지지하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컴퓨터 이론가인 빌 조이이다. 2000년 4월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논문인 ‘왜 우리는 미래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에서 조이는 분자 어셈블러 개념에 전폭적인 공감을 나타내고, 자기증식하는 나노로봇이 지구 전체를 뒤덮는 그레이 구(gray goo), 곧 ‘잿빛 덩어리’ 상태가 되면 인류는 최후의 날을 맞게 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2002년 미국의 소설가인 마이클 크라이튼(1942~2008)은 드렉슬러의 아이디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한 소설 『먹이 (Prey)』를 발표하여 그레이 구 시나리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자기복제하는 나노로봇 떼는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괴물이 되어 사람을 먹이로 해치운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도 드렉슬러를 지지한다. 2005년 펴낸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커즈와일은 다음과 같이 어셈블러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2020년대가 되면 분자 어셈블러가 현실에 등장하여 가난을 일소하고, 환경을 정화하고, 질병을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활동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5월 초에 출간된 저서 『급진적 풍요(Radical Abundance)』에서 드렉슬러는 나노기술이 바꾸어 놓을 미래를 전망하면서 어셈블러로 생산하는 방식을 ‘원자 정밀 제조(atomically precise manufacturing, APM)’라고 명명하고, 기존의 생산방식이 APM으로 바뀌게 되면 물질문명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서 인류 사회가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드렉슬러와 스몰리의 논쟁은 시간이 가면 판가름날 것이다. 나는 어느 편인가 하면 스몰리보다 드렉슬러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는 기계를 꿈꾸는 인간의 상상력이 실현되는 것처럼 멋들어진 일도 없을 테니까.



이인식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지냈다. 신문에 490편, 잡지에 160편 이상의 칼럼을 연재했다. 『지식의 대융합』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등을 펴냈다.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inplan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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