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학우로 만나 전우 된 서울고 동문 457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난 2일 서울고 재학 중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함경호(78·왼쪽)씨가 설민구(49)씨와 경기 일산의 거리를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6·25전쟁 중 함씨는 고교 동창인 설씨의 아버지와 함께 적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고양=김성룡 기자]

6·25 한국전쟁이 터진 지 다섯 달째인 1950년 11월 26일. 서울중 3학년 함경호(당시 15세)는 평안남도 덕천 월봉산 기슭에 있었다. 그는 국군 7사단 18포병대대 소속 이등병이었다. 서울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지 38일째 되던 날이었다. 18포병대대는 살얼음 낀 월봉산 계곡에 진을 치고 있었다.

 “쾅, 쾅, 쾅…타타타 ….” 동틀 무렵 적 의 기습 이었다. 참호 속 포병들이 50㎜ 기관포와 105㎜ 곡사포로 대응했 지만 중공군은 계곡을 벌떼처럼 뒤덮었다. 포차 적재함 철판을 중공군의 기관총이 무참하게 긁어댔다.

 “철수하라, 철수하라.”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함경호는 진지를 벗어나 산으로 내달렸다. 도망가던 동료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몇 시간이나 내달렸을까. 그가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을 때 서울중 1년 선배 설규용(당시 17세)을 만났다. 반가움은 잠시였다. 적의 총격음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은 대여섯 명의 국군 무리와 함께 숲을 헤치고 능선에 올랐다. 밤이 깊을 무렵 설규용이 의식을 잃었다. 함경호는 동료들에게 “설규용이 의식을 잃은 것 같으니 돌아가며 업고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돌렸다. 동료들은 하나둘 그들 곁을 떠났다. “저 사람들 따라 먼저 가.” 규용이 말했다. “어떻게 나 혼자 가?” 경호는 울먹였다. “그럼 날 쏘고 가.” 규용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경호는 “그런 말 하지 마”라며 규용을 부축했다.

 쇠한 기력을 부추기며 둘은 밤새 산줄기를 헤맸다. 다행히 한 토막집에서 강냉이밥을 얻어먹고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추수 뒤 밭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씹으며 남쪽을 향해 걸었다. 사흘 뒤 처음 만난 이들은 다행히 아군인 터키군이었다. 사지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이다.

  이렇게 전우로 남은 서울고 동문을 기리는 ‘6·25 참전용사 명패 증정식’이 4일 학교 강당에서 열린다. 수도방위사령부 는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고 동문 참전용사 457명의 이름과 소속을 새긴 명패를 전달한다고 3일 밝혔다. 당시 18포병대대에서 활약한 함경호(78)씨 등 생존 용사 250여 명 중 100여 명이 행사에 참석한다.

 6·25전쟁 당시 6년제 중학교였던 서울고는 서울 지역 학교 중 참전용사와 전사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1~6회 입학생 1178명 중 39%인 457명이 참전해 35명이 전사했다. 총동창회의 열성도 뜨겁다. 당시 졸업생을 전수 조사해 소속과 참전 여부를 밝혀 국방부의 확인까지 받았다. 현정원 총동창회장은 “서울고의 전통은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는 초대 교장 김원규 선생의 말씀을 실천해온 결과”라고 말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학도의용군=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가한 군인들. 총 20만 명이 참전했다. 전쟁 초기 계급·군번도 없이 교복을 입은 채 전장을 누볐다. 전선이 안정되던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복교령(復校令)을 내렸지만 일부는 국군에 입대해 전쟁을 치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