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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펑, 독일 황제 앞에서 허리 굽히길 거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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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호 29면

1901년 ‘頭等專使大臣’ 자격으로 독일에 가던 도중, 홍콩에 잠시 체류 중인 순친왕 짜이펑(앞줄 자리에 앉은 사람). 당시 18세였다. [사진 김명호]

청(淸)나라는 섭정왕(攝政王)에서 시작해 섭정왕으로 막을 내렸다. 반복해 읽어야 이해가 될 정도로 내용이 좀 복잡하다. 1616년, 만주(滿洲)를 통일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지배자 누르하치가 후금(后金)을 건립했다. 20년 후, 누르하치의 8남 황태극(皇太極)이 황제를 칭하며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선언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4>

1643년, 황태극이 급서하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황제 후보였던 누르하치의 14남 돌곤(多尔袞)이 황태극의 아들인 다섯 살배기 복림(福臨:순치제)을 황제에 추대했다. 아버지 누르하치의 유언에 의해 아름다웠던 생모를 순장했던 돌곤의 대 정치가다운 행동에 다른 후보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섭정왕을 자처한 돌곤은 군대를 몰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었다.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을 베이징에서 내쫓고 천하에 군림했다. 1650년, 38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황제나 다를 바 없었다.
돌곤 사망 258년 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섭정왕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1908년 가을, 제국의 실권자 자희(慈禧·서태후)와 황제 광서제(光緖帝)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11월 13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동생인 제2대 순친왕(醇親王) 짜이펑(載沣·재풍)과 푸이(溥儀·부의) 부자를 섭정왕과 후임 황제에 각각 임명했다. 다음날 광서제가 세상을 떠났다.

또 하루가 지났다. 15일 오후, 늦은 점심을 마친 서태후가 갑자기 혼절했다.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서야 마지막 정신이 돌아왔다. 만면에 근심이 가득한 권신들에게 이틀 전에 했던 말을 재삼 반복했다. “내 병세가 위급하다. 더 이상 일어날 기력이 없다. 국정의 모든 권한을 순친왕 짜이펑에게 이양한다.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태후와 의논은 하되 결정은 순친왕이 해라.”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48년간 정국을 주도하던 서태후도 황천길을 떠났다.

독살설을 필두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서태후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 제일 오래갔다. “다시는 부인네들이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라. 환관들의 농간에 놀아나기 쉽고, 본 왕조의 가법에도 위배된다.” 나머지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평소 좀 모자란다는 소리 듣던 남자들일수록 입을 놀리다가 모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궁궐과 감옥처럼 담장이 높은 곳도 없다. 5성급 감옥이나 진배없는 궁궐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전 세계가 하루아침에 노(老) 제국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25세의 청년을 주목했다. 허구많은 황족들 중에서 짜이펑을 지목한 서태후의 의중을 가늠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세 살짜리 황제는 덤이었다.

짜이펑은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침착했다. 황족들 중에서 두드러진 편이 아니었다. 부끄러움도 잘 탔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서태후만은 예외였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짜이펑을 볼 때마다 시동생이며 매부였던 이솬(奕譞·이현)의 젊은 시절 모습이 어른거렸다. 부전자전은 어쩔 수 없다며 웃기 일쑤였다. 주변에서 나약한 게 흠이라고 하면 화를 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850년 함풍제(咸豊帝)가 즉위했다. 함풍제는 동생 이솬을 순군왕(醇郡王)에 봉했다. 직함은 번듯해 보이지만 별것도 아니었다. 나이도 열 살에 불과했다. 함풍제 재위기간 이솬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1861년 함풍제가 재위 1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라곤 여섯 살밖에 안 된 서태후 소생이 유일했다. 임종 직전 8명의 권신들에게 240여 년 전 누르하치와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 “어린 황제에 젊은 황태후, 나라를 절단 낼지 모른다. 수렴청정을 실시하되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태후를 죽여버려라.”

서태후는 시동생 공친왕(恭親王)과 정변을 일으켜 권신들을 제거했다. 평소 조용하던 21세의 이솬이 전광석화처럼, 눈 하나 깜짝 않고 공친왕의 대열에 합류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야심 많고 활달한 공친왕보다 이솬을 더 좋아했다. 순친왕에 봉하고 친정 여동생과 결혼을 권했다. 아들 동치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이솬의 아들을 황제(광서제)에 앉혔다. 이솬이 죽자 짜이펑이 순친왕을 계승했다. 친왕과 군왕은 천지 차이였다.

서태후는 짜이펑도 총애했다. 20세기 벽두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고 선교사와 외국인들이 맞아 죽었다. 독일공사가 피살되고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서태후는 변복 차림으로 황제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도망쳤다.

독일 측에서 사죄사를 보내라고 압박했다. 서태후는 짜이펑을 파견했다. 황제의 친동생이다 보니 자격에 손색이 없었다.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짜이펑은 “독일 황제가 정좌하면 3번 허리 굽혀 절하라”는 독일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평소 겸손하고 조용했던 사람답지 않게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독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2주일간을 버텼다. 서태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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