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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금리 요동 … 암초 만난 엔저공세 아베노믹스 '부러진 화살'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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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국 사우샘프턴대 리하르트 베르너 교수는 ‘양적 완화(QE)의 아버지’로 불린다. 독일계인 그가 일본은행(BOJ)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던 1994년 ‘료테키긴유간화(量的金融緩和)’라는 정책을 제시했다. 막 시작된 일본 디플레이션과 경기침체에 대한 처방이었다. 그는 지난달 중순 기자와 통화에서 “무제한 QE를 바탕으로 한 아베노믹스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며 “바로 금리 상승”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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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즈음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 금리)은 연 0.5%도 되지 않았다. 그런 데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가 파상적으로 돈을 찍어내고 있었다. BOJ 기준금리도 2008년 12월 이후 4년 넘게 0.1%로 유지되고 있다. 어디를 봐도 금리가 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가. 지난 22일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연 0.88%를 기록했다. 한 달도 안 돼 금리가 두 배 뛴 것이다.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거니 했다. 그게 아니었다. 이틀 뒤인 23일엔 장중 한때 연 1%에 이르기도 했다. 순간 도쿄 주식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날 도쿄 주가는 7% 넘게 추락했다.

경제 살릴 ‘세 가지 화살’ 무력화 가능성

 여러 가지 요인이 폭락 원인으로 꼽혔다. 하루 전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미국 QE 축소 시사와 그날 드러난 중국 제조업지수 둔화 등이었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문가들이 금리 상승을 계기로 드러난 아베노믹스의 치명적 결함을 (폭락의) 핵심 원인으로 꼽고 있다”고 전했다.

 그날 BOJ가 황급히 시장에 뛰어들었다. 매물이 쏟아진 국채를 2조 엔(약 22조원)어치 사들였다. 이후 구로다 총재가 금리상승 억제를 공약했다. 더욱이 일요일인 26일엔 “경제회복과 함께 국채 금리가 3%까지 올라도 은행 등 금융시스템엔 문제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월요일인 27일 도쿄 주가는 다시 3% 넘게 떨어졌다. 구로다의 발언에도 시장의 우려가 가시지 않은 셈이다.

 왜 국채금리 상승이 그토록 시장을 긴장시킬까. FT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국채금리 상승이 아베노믹스의 핵심인 성장 전략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성장 전략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다음달 공개할 이른바 ‘세 번째 화살’이다. 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화살은 재정 지출 확대와 무제한 QE다.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교수는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세 번째 화살은 서비스·에너지·정보기술(IT) 산업의 투자를 자극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세 분야의 불필요한 규제를 푼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자 부담이 늘어나면 규제 완화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요즘 국채 금리 급등에 시장이 긴장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예상보다 너무 가파른 게 문제다. BOJ는 국채 금리가 서서히 올라 올 연말에나 1% 선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요즘 오름세라면 국채 금리가 6월 안에 BOJ 연말 예상치를 넘어설 태세다.

 갑작스러운 국채금리 상승은 미국이 2차 QE 중이던 2010~2011년 사이에 겪었던 일이다. 당시 미 재무부 채권 금리가 갑자기 뛰어 회복하던 미 경제를 위축시켰다. 더블딥(경기 회복 뒤 재침체) 우려가 당시 커진 배경이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 국채 금리 급등은 파상적인 1차 QE 이후 2년 지나서 나타났다”며 “하지만 일본은 무제한 QE 이후 한두 달 정도 만에 겪고 있다”고 전했다. 오가타 가즈히코 크레디트아그리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4일 FT와 인터뷰에서 “일본 국채금리가 BOJ 통제 범위를 벗어나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금리 1%p 오르면 정부 이자 1.5조 엔 증가

 더욱이 일본 국채금리 급등은 아직 실물 경제가 뚜렷하게 되살아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구로다 총재가 26일 말한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그는 “경제가 되살아나면 자연스럽게 금리도 오르게 마련”이라며 “하지만 경제 회복이 미약한데 금리가 오르면 일본 금융 시스템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 시중은행이 보유 중인 최대 자산이 바로 국채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시중은행들은 민간 대출을 하지 않고 국채를 대거 사들인 탓이다. 국채 금리 상승은 곧 국채 가격의 하락을 의미한다. 시중은행의 자산뿐 아니라 자본 가치도 줄어든다.

 BOJ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국채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대형 시중은행 핵심자본(Tier 1)이 10%, 지방은행은 20%까지 감소할 수 있다. 일본으로선 악몽 같은 일이다. 시중은행의 대출에 제동이 걸리는 일이 벌어져서다. 일본은 1990년 이후 20여 년 동안 대출이 이뤄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국채금리 상승은 일본 정부의 이자부담도 키운다. BOJ가 예상한 올해 정부 이자 부담은 9조9000억 엔 정도다. 국채금리가 서서히 올라 1% 정도에 머문다는 가정 아래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금리가 1.5%에 이르면 이자 부담은 7750억 엔 정도 늘어 10조6750억 엔 선까지 불어난다. 국채금리가 2%라면 1조5500억 엔 더 증가해 올 이자부담 총액이 11조4500억 엔에 이른다.

은행 부실자산 늘어 경기침체 빠질 수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금리 부담이 늘어나면) 일본 정부도 남유럽 국가들처럼 시장의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라고 전했다. 바로 ‘늑대무리의 공격(Wolf Pack)’이다. 헤지펀드들이 일본 국채를 대거 공매도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은 공매도가 낳은 고금리를 견디지 못했다.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 국채의 대부분은 외국인이 아닌 일본 국내 투자자 수중에 있다. 스페인과 비슷한 상황이다. 스페인 투자자들은 위기 순간 국채를 덤핑(매도공세)하지 않고 견뎠다. 스페인 정부가 지난해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한 요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FT는 “스페인 시중은행 부실자산이 급증해 대출이 급감하며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고 전했다. 이는 아베노믹스가 ‘최악의 경우’ 초래할 수 있는 결과다.

강남규 기자

◆세 가지 화살

아베노믹스의 세 가지 핵심 요소인 양적 완화(QE), 재정지출 확대, 성장 전략 추진을 말한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해 12월 취임하면서 옛날 일본 무사가 아들들에게 화살 한 개를 부러뜨리긴 쉽지만 세 개를 한꺼번에 부러뜨리기는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며 힘을 합쳐 가문을 세우라고 한 일화를 언급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1990년 이후 20여 년 동안 시차를 두며 따로따로 실시한 양적 완화, 재정지출, 성장 전략 등의 정책들을 시차를 최소화해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베는 다음 달 세 번째 화살인 성장 전략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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