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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기술은 학력보다 능력 … 1㎜의 실수도 없이 금 딸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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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다음달 독일에서 개최되는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는 원현우·장준희·홍진무(왼쪽부터)씨가 훈련장인 울산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 앞에 모여 각오를 다지고 있다. [사진 현대중공업]

“작은 일에도 최선(정성)을 다한다, 훈련 중 화장실을 가지 않겠다, 하루가 짧다고 생각하고 훈련에 임한다, 기필코 금메달을 획득하겠다….”

 24일 오후 3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한편에 자리잡은 기술교육원 실습장. 벽에는 ‘나의 각오’라는 제목의 다짐문이 붙어 있었다. 줄줄이 나열된 8개 항의 문구 뒤에는 “위 사항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3명의 동료로부터 개선을 촉구하는 매를 5대씩 맞겠다”라는 각오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범상치 않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이 글의 작성자는 맨 아랫부분에 서명을 남겼다. ‘대한민국 국제기능올림픽 배관 대표선수 장준희.’ 올해 19세인 그는 다음 달 26일부터 7월 11일까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국제기능올림픽 배관 부문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한때 기능올림픽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80년대 우리나라가 우승을 독차지했던 기능올림픽은 내세울 것이 별로 없던 시절, 범국가적인 자랑거리였다. 대한민국은 자신을 빛내준 기능인력들을 아끼고 사랑했고, 그들도 제조현장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사랑을 되갚았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고 자랑할 것이 많아지면서 기능올림픽은 서서히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기능올림픽은 여전히 기능인력들에게 꿈의 무대다. 기능올림픽 출전을 염원하는 수많은 기술인력이 ‘기술한국’의 토대를 다지고 발전시켜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도 변함없다. 그중에서도 현대중공업은 좀 더 특별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따낸 총 271개의 금메달 중 현대중공업 직원들이 20%에 가까운 45개를 따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올해도 4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했다. ‘선수촌’이라 불리는 인천의 글로벌훈련센터에서 따로 훈련 중인 통신망분배기술직종 대표 은성현(18)씨를 제외한 3명이 울산에서 마지막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훈련장에는 원씨가 만든 휠로더 모형(오른쪽 위)과 장씨가 붙여 놓은 ‘나의 각오’ 다짐문(오른쪽 아래)이 보인다. [사진 현대중공업]

 장씨는 파이프를 연결해 가상의 벽을 2개 만들어 놓고 그 사이에 각종 배관을 설치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배관 종목은 별도의 도면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올림픽 현장에서 스스로 도면을 만든 뒤 실무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 옆에서 신충찬(57) 기능인재육성팀장이 판금 부문 국가대표 홍진무(19)씨가 만든 화구를 들여다보면서 그를 지도하고 있었다. “티그 용접기에서 나오는 아르곤 가스가 보호를 해줘야 접합면이 예쁘게 나오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이 부분이 시커멓게 되잖아. 방법을 찾아보자고.” 홍씨는 이번 기능올림픽 심사위원이기도 한 신 팀장의 조언을 들은 뒤 열심히 용접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철골구조 부문 국가대표인 원현우(21)씨는 실습장 맨 안쪽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가 만든 휠로더 모형이 근사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모두 중학교 때 일찌감치 기술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전남 영암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장씨는 나주공업고등학교가 배관 분야에서 유명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스스로 학교를 찾아갔다. 홍씨와 원씨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신라공고와 인천기계공고 진학을 결정했다. 원씨는 “반드시 대학을 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공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노력과 경쟁의 승자들이기도 하다. 공고의 경우 입학과 동시에 내부 경쟁이 시작된다. 내부 평가전을 통해 기능경기대회 출전 인력을 선발하는데 그 인원은 극소수다. 이들 3명의 출신교들의 경우 선발인력이 학년당 2~20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음 단계는 17개 시·도별 지역 대회. 여기서 3위 내에 들어야 전국대회 출전 자격을 확보한다. 전국대회에서는 1, 2위를 해야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수 있다. 기능올림픽이 2년마다 개최되는 반면, 국내대회는 매년 치러지기 때문에 두 차례의 국내대회에서 각각 1, 2위에 입상한 4명이 대표 선발전을 치른다. 여기에서 1위를 해야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

 고교 1학년 때 대회 출전 인력으로 선발되면 곧바로 합숙훈련이 시작된다. 국가대표가 되면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훈련을 한다. 주말도 없는 ‘주 7일 노동’이다. 이들 모두 4~5년씩을 고된 합숙생활로 보냈다는 얘기다. 젊은 청춘들인 만큼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원씨는 “국가대표에 선발된 뒤 한동안 나태해져서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홍씨는 “고교 때 훈련장소가 지하였는데 한여름에 너무 힘들어서 포기해버릴까 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래지 않아 유혹을 이겨냈다. 원씨는 “대회가 끝나면 원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말했다.

 만만치 않은 희생을 감내할 만큼 기능올림픽 금메달은 평생의 꿈이다. 혜택도 크다. 금메달을 따면 정부에서 6720만원의 상금과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군대 면제, 연금 지급 등 각종 혜택을 준다. 회사에서도 별도로 1000만원의 상금과 1계급 특진 혜택을 준다. 은·동메달의 경우에도 액수는 좀 낮아지지만 비슷한 혜택을 받는다. 재도전이 불가능한 말 그대로 ‘한 판 승부’라는 점도 승부욕을 배가시킨다. 기능올림픽은 만 22세 이하라는 연령 제한이 있고 단 한 번밖에 출전할 수 없다.

 물론 쉽지는 않다. 대회는 종목별로 4일에 걸쳐 총 22시간 동안 진행된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며 실수는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유태근(57)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장은 “5㎝를 깎아야 하는데 단 한 번의 실수로 1㎜를 더 깎아버리면 그걸로 그 사람의 올림픽은 영원히 끝나버린다”고 말했다. 외국의 견제도 이겨내야 한다. 우리나라가 17차례나 우승하다 보니 주최 측은 규칙을 수시로 변경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생소한 종목들을 계속 신설하고 있다. 유 원장은 “마치 우리나라 여자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양궁 규칙을 계속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특히 이번에는 유럽국가들의 견제와 텃세가 심할 것으로 예상돼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여야만 우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표선수들은 대회 2주 전부터 시차적응 훈련에 돌입한다. 일주일 동안 취침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씩 앞당긴 뒤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는 독일 시간에 맞춰 생활하게 된다. 그러고는 결전의 현장으로 출국한다.

 장씨는 젊은이다운 건강함이 묻어 나오는 각오 한마디를 남기고 훈련장으로 되돌아갔다. “뒷바라지해준 부모님과 회사 선배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한 나를 위해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고 싶습니다.”

울산=박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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