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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터미널은 문명 압축판 … "화성인에게 보이고 싶은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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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세계 최고의 공항’. 이젠 익숙한 말이다. 인천공항은 지난 2월 발표된 2012년 세계 공항 서비스평가에서 8년 연속 1위에 올랐다. 다음달 터키 이스탄불에선 시상식이 열린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있다. 인천공항의 겉이 아니라 속이다. 하루 600여 편의 비행기, 10만여 명의 여객이 이용하는 공항에선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닷새간 이곳에서 먹고 자면서 인천공항의 24시를 지켜봤다.

지난 15일 인천국제공항 상황관리센터(AOC) 근무자들이 입·출국장, 항공기 계류장 등의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인천공항에는 총 1800여 대의 CCTV가 있다. AOC에선 이를 이용해 공항 곳곳의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강정현 기자]

지난 15일 오전 11시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1층 상황관리센터(AOC). 상황 근무자 10여 명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5대의 버스에서 내린 불교 승려·신도 200여 명이 3층 4번 출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터미널 내부 폐쇄회로TV(CCTV)에 잡힌 영상이었다. 불교계는 석가탄신일(17일)을 앞두고 터미널 내부에 전통 등(燈)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공항 측이 “특정 종교시설이라 곤란하다”고 거부하자 이날 항의 방문을 온 것이다.

공항의 눈 1800개 … CCTV에 딱 걸렸네

 AOC에 비상이 걸렸다. 공항 보안을 책임지는 터미널대테러센터(TCC)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순찰하던 보안요원이 TCC에 무전 보고를 했고, TCC가 이를 AOC에 전달한 것이다. AOC 근무자들은 매뉴얼에 따라 운영총괄팀 등 공항 관계부서에 상황을 알렸다. AOC는 공항의 종합상황실이다. 내부에 대형 모니터만 30대(32인치 18개, 50인치 12개)가 있다. 이걸로 공항 곳곳에 설치된 1800여 개(터미널 내부 900여 개)의 CCTV 영상을 볼 수 있다. 여객터미널·탑승동에 있는 130대의 탑승교, 1180대의 승강시설 운영 상황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터미널에 들어온 승려·신도들은 C·D 발권창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법회를 열었다. 하지만 다행히 물리적 마찰은 없었다. 오후 2시40분 상황이 종료됐고, AOC는 평온을 되찾았다. 김윤진 AOC 상황관리팀장은 “만약 공항 이용객들이 큰 불편을 겪거나 충돌이 있었다면 AOC·보안팀 책임자가 직접 현장에 출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항 측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공항경찰대에 강제퇴거를 요청할 수도 있다.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를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한 장소에 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런던 히스로 공항의 초청을 받아 1주일간 공항에 머무른 뒤 쓴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2009)에서 공항을 이렇게 표현했다. 공항이 항공·건축 등 첨단 기술의 경연장이자 수많은 사람의 기쁨과 슬픔, 땀과 눈물이 교차하는 곳이란 점에 착안한 것이다. 책의 배경은 히스로 공항이지만 그의 얘기는 인천공항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인천공항의 총 부지는 5616만8000㎡다. 서울 여의도의 7배 크기다. 여객터미널 한 곳의 연면적만 49만6804㎡, 63빌딩의 3배다. 머리 위로 10층 건물 높이(24.1m) 코끼리 112마리 무게(560t)의 비행기(A380)가 날아다니고, 입국장에선 만화 ‘스누피’의 모델인 비글(검역견의 품종)이 돌아다닌다. 한 해 약 3900만 명의 여객이 거쳐가는 대한민국 대표 관문이자 920개 상주기관 3만5000여 직원이 어울려 살아가는 일터다.

3만 5000명 상주, 1년 3900만 명 이용

인천공항은 24시간 잠들지 않는다. 14일 오전 6시 20분 아시아나항공 발권창구에서 첫 고객을 맞는 지은영씨(사진 위)와 16일 오전 2시 친구와 영상통화 중인 볼리비아 여행객 닥스 페초. [김한별 기자]

 아시아나항공 프리미엄(1등석·비즈니스석) 발권창구에서 일하는 지은영(32)씨는 14일 오전 3시30분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1시간 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집을 떠나 오전 5시2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창구가 열리는 시간은 매일 오전 6시10분. 아침근무조 퇴근시간은 오후 3시다. 지씨는 “오전 피크타임(7~9시)이 지나면 교대로 숨을 돌린다”고 했다.

 발권창구 직원들은 한 번 근무 때 100명 안팎의 고객을 상대한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자주 겪는다.

아시아나항공 강지윤(23)씨는 일반 창구에 긴 줄이 늘어섰을 때 해피맘 창구를 찾아온 30대 커플 얘기를 들려줬다. 이 창구는 24개월 이하 유아 동반자만 이용할 수 있는 창구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가리키며 “우리 아기 여기 있지 않냐”며 발권을 재촉했다. 여자도 정색을 하고 “내가 이 사람 아기”라고 맞장구를 쳤다.

 중앙아시아 출신 근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중고차 부품을 많이 가져간다. 대한항공 김선영(26)씨는 “일부러 마감시간 직전까지 기다렸다 규격(가로 158cm)이 넘는 범퍼를 수하물로 부쳐달라고 떼쓰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시간 내에 발권을 마쳐야 하는 창구 직원들의 급한 마음을 노린 ‘꼼수’다.

막말 속앓이 … 직원들 숨어 우는 장소도

 손님들 막말에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많다. 아시아나항공 정주예(25)씨는 “신입 때 단체 짐을 부치는데 일처리가 늦다고 손님이 ‘X년 X년’ 욕을 해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지은영씨는 “‘비자가 없다’고 하자 ‘알아서 갈 건데 꼬치꼬치 따진다’며 여권을 집어던진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에겐 속상할 때 찾는 자기만의 아지트가 있다. 내 경우엔 신입 시절 터미널 3~4층 비상계단에서 많이 울었다”고 전했다.

 공항 사람들은 항공사 발권창구 등이 있는 곳을 랜드사이드(Land Side)라고 부른다. 비행기를 타는 에어사이드(Air Side)로 넘어가기 전 지역을 가리킨다. 에어사이드에는 출입증을 가진 상주 직원과 여권·항공권이 있는 여객만 들어갈 수 있다. 랜드사이드에서 넘어갈 땐 반드시 CIQ-Customs(세관)·Immigration(출입국관리)·Quarantine(검역)-를 거쳐야 한다. 피크타임 때 출국장에 줄이 길게 늘어서는 건 CIQ 앞에서 병목현상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터미널은 밤이 깊어도 잠들지 않는다. 이맘 때 가장 붐비는 곳은 지하 1층 사우나다. 손님 대부분은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려고 지방에서 올라왔거나, 거꾸로 저녁 비행기가 연착돼 지방에 가는 막차를 놓친 여행객들이다. 14일 오후 11시 넘어 만난 중국동포 강모(58)씨도 그랬다. 충남 아산에서 용역 일을 하는 그는 칭다오(靑島)에서 비행기 출발이 늦어져 오후 10시 넘어 인천공항에 내렸다. 오후 9시30분 아산행 막차가 끊긴 뒤였다.

강씨는 “버스정류장에서 일하는 분이 알려줘 오긴 왔는데, 사우나 값(야간 2만원)이 뭐 이리 비싸요? 아산에선 7000~8000원이면 되는데”라고 말했다.

 이곳 입장료는 24시간 기준이다. 1만2000원을 더 내면 간이침대가 딸린 1인 수면실(남녀 각 8실)에서 잘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만실이라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기자도 첫날 밤 헛걸음한 뒤 예약을 해 둘째 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자정이 되자 공용휴게실 침대형 의자 20여 개가 거의 다 찼다. 차민국(28) 점장은 “성수기 때는 바닥까지 사람이 차 걸어다니기도 힘들다”고 했다.

막차 끊겼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젊은이·외국인들은 터미널 벤치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16일 오전 2시에 만난 볼리비아인 닥스 페초(35)는 태블릿PC로 태평양 건너 친구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업차 중국을 방문했다 귀국길에 한국에 들렀다고 했다.

그는 “보안요원들이 한밤중에도 순찰을 해 안심이 되고, 무선 인터넷을 공짜로 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잠은 안 자느냐”는 질문에 “비행기에서 자면 된다”며 다시 태블릿 PC에 코를 묻었다.

인천=김한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랜드사이드=비행기 이착륙 지역(에어사이드)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여객·상업시설 등을 가리킨다.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의 경우 3층 1~4번 출국장, 1층 A~F 입국장 안쪽이 에어사이드, 바깥은 랜드사이드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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