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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뭐든 붙잡고 희망이라 우겨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4호 27면

4월부터 나는 전국을 다니며 희망특강을 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엔 강의 현장에 찾아온 여러 언론 매체와 인터뷰 일정도 끼어 있었다. 기자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물음은 대개 이것이다.

“저희가 볼 땐 아직 희망의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데, 신부님께선 왜 희망이 왔다고 말씀하시는지요? 아직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오지 않았는데, 벌써 희망 이야기를 한다는 건 좀 이른 감이 없지 않나요?”

“희망은 밖에서 오기도 하고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희망은 시류를 타기 때문에 기약도 없고 들쭉날쭉입니다. 이런 희망만 기다리며 살면 우리는 노상 외풍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을 섬세하게 맞아들인다면 우리는 밖의 상황과 무관하게 주체적으로 신나게 살 수 있지요.”

“….”

“게다가 우리가 먼저 안으로부터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외부에서 오는 아주 작은 희망의 플러스 알파마저 놓쳐 버리게 됩니다. 먼저 희망을 가져야 그걸 포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거죠. 그러기에 희망할 이유가 없다 해도 우리는 희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희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이라도 이런 내 얘길 듣고 나면 순간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질문자의 내면에서 희망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가 엿보일 때 나는 온갖 역풍을 거스르고 희망을 외쳐온 내 행보에 일말의 위로가 드리워짐을 느낀다.

내 희망담론은 희망 콘텐트에 관한 것이 아니다. 희망 콘텐트, 즉 무엇이 우리에게 희망이냐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처지에 맞게 채워야 할 몫이다. 희망과 관련해 내가 주목하는 건 희망 현상 또는 희망 형식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희망이라는 ‘현상’ 그 자체가 지니는 엄청난 모멘텀(동력이라 불러도 좋겠다)을 주시하자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플라시보(위약) 효과라는 말이 있다. 환자에게 가짜 약을 처방하면서 “이 약은 참으로 신통한 신약입니다. 몇 번만 드시면 증세가 호전될 겁니다”라고 확신을 주면 신통하게 효력이 나타난다는 거다. 이 사실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가. 바로 희망 현상의 효력이다. 그 약을 받는 순간, 환자에게는 “아, 이제 이 약을 먹으면 낫겠구나!”라는 희망이 생기기 마련. 바로 그 속아서 가진 엉터리 희망이 정말로 일정한 효능을 발휘한 것이다! 이렇듯 희망은 콘텐트와 무관하게 그 현상 자체로 힘을 발휘한다. 그러기에 나는 충분한 절망의 명분을 갖고 절망을 결론으로 선택한 이들을 향하여 일관되게 선언한다.

“그렇다면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겨라!”

왜? 그 근거 없는 희망이라도 붙잡아서 거기서 나오는 기운이라도 받아 그 힘으로 버티는 것이 최후의 살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최후의 생존자는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희망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 사냥꾼이 30마리의 사냥개를 풀어 토끼를 잡으러 갔다. 토끼가 한 마리 나타나자 30마리의 개가 거의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29마리의 사냥개는 나가떨어졌다. 단 한 마리의 사냥개만이 계속 뛰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포기한 29마리의 사냥개는 토끼를 보고 달린 게 아니었다. 앞의 사냥개를 쫓아 덩달아 뛰었을 뿐이다. 맨 먼저 달린 사냥개만 토끼를 직접 봤기 때문에 끝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희망을 직접 본 사람은 끝까지 달린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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