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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아베노리스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4호 29면

패전 전의 일본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라고 한다. 15세기 전국 제일의 모략가로 유명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죽기 전 세 아들을 불렀다. 그는 화살을 하나씩 주며 꺾어 보라고 했다. 세 아들은 화살을 아주 쉽게 꺾었다. 그러자 모리는 3개의 화살을 묶은 뒤 다시 꺾어 보라고 했다. 누구도 꺾지 못했다. 모리는 “단결하면 누구도 꺾지 못하지만 불화의 틈이 생기면 다 망한다”고 훈계했다. 장남이 모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임종 전 유언일 수 없다, 그러니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일 뿐이란 지적도 있다. 어쨌든 군국 일본은 신민이 단결하면 어느 나라도 일본을 꺾을 수 없다는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이 일화를 이용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해 선거 때 자신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세 개의 화살’로 설명했다. 양적완화, 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새로운 성장전략이다. 아베노믹스가 부러지지 않는 모리의 화살처럼 강력하고 튼실한 정책이란 이미지를 유권자에게 심어 주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쓴 듯하다.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일본은 3고(高)를 실현했다. 주가가 급등하고, 환율도 뛰었다(엔저). 그 덕분에 아베의 인기가 치솟았다. 모든 게 순탄한 듯했다. 반대파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제3의 화살은커녕 두 개의 화살만 묶어 봤을 뿐인데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는 최근 복병을 만났다. 장기 국채 금리의 급등이다. 공격적인 완화정책 발표 이후 0.3%대까지 내려갔던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한때 1%까지 올라갔다. 양적완화는 길게 보면 장기 국채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화폐 가치가 떨어져 국가 채무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국가 재정의 건전성이 의심받으면 국채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양적완화로 물가가 올라도 금리에는 인플레이션 프리미엄이 붙는다.

문제는 속도다. 왜 그리 빠르게, 게다가 일찍 금리가 올랐느냐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듯 미지의 경로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지금까지 나온 설명은 대충 이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는 주식으로 투자 대상을 바꾸기 위해 국채를 파는 이가 많아졌다. 일본은행이 양적완화 차원에서 엄청난 양의 국채를 사들이고 있지만 ‘팔자가 팔자를 부르는’ 시장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워낙 ‘팔자’가 많다 보니 국채 가격이 하락(금리는 상승)했다는 말이다.

일본은행이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국채 매입 횟수를 늘려 한 번에 사들이는 국채 규모를 줄이는 정도의 대책뿐이었다. 5·23 주가 폭락사태는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중앙은행이 시장에 믿음을 주는 데 실패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시장 참여자가 아베노믹스의 취기에서 잠시 깨어나 중앙은행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시장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그만큼 시장 참여자도 조마조마한 법이다.

아베노믹스는 큰 실험이다. 실패냐 성공이냐 전망도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한국에는 부담이다. 일본의 실패가 더 위험할 수 있다. 국채 금리가 계속 오른다면 가격 하락으로 손실을 떠안은 일본 금융권이 해외 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일본발 금융위기 시나리오다. 일본의 야당은 이번 주가 폭락사태와 관련해 “아베노믹스는 없고 아베노리스크만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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