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류 망치는 싸구려 한국관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잔 나타니차 새방(18·여)은 지난달 23일 오전 7시30분 잔뜩 부푼 맘을 안고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남동생 2명, 고모에 친구 가족까지 9명이 함께 한국을 찾았다. 배우 이민호의 팬인 잔을 위해 엄마가 마련한 쏭클라대 치대 합격 선물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찍었던 곳에서 한류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잔은 “3박4일간 2만4000바트(약 90만원)면 정말 싼 것 아니냐”고 기뻐했다.

 기자는 외국인 관광객 1000만 시대를 맞아 한국의 이미지를 망친다는 저가 여행상품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동행 취재했다. 기자가 23~26일 담당한 손님은 잔 일행을 포함한 태국인 관광객 20명이었다. 여행업체에서 비행기값을 절반 이하 가격으로 샀다 하더라도 숙식비, 이동 교통비, 관람료 등을 포함한 3박4일간 1인당 경비는 30만~4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찾은 중국과 동남아 관광객은 500여만 명에 이른다. 이 중 저가 관광객은 15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한국 관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오전 10시30분쯤 강원도 남이섬 인근에 도착해 이들이 처음 맛본 한국 음식은 ‘투어 닭갈비’였다. 국내산 1만원이라고 적힌 춘천 닭갈비와 달리 양배추에 묻혀 닭고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관광객이 앉자마자 종업원들이 밥을 붓고 볶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양배추 볶음밥 같은 정체불명의 음식이 됐다.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11만4000원. 여행사 직원 5명의 식사비 5만원을 감안하면 태국인 관광객은 1인당 3200원짜리 식사를 한 셈이다.

 24일 오후 10시 서울 동대문 D쇼핑몰 한 의류매장. 잔의 가족이 청소년 캐주얼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가이드 T(36·여)는 자연스레 E매장으로 데려갔다. 잔 가족은 청바지 2개, 티셔츠 2장, 레깅스, 남방 등을 고르고 39만5000원을 지불했다. 계산이 끝나자 T는 주인에게 5%의 수수료를 요구했지만 “50만원이 안 돼 수수료는 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이드가 무리하게 관광객들에게 쇼핑을 권하는 이유였다.

 25일 오전엔 인삼-화장품-헛개나무-김 가게를 돌았다. 마지막 날인 26일 일정은 자수정·솔잎기름 판매점과 대형마트를 들렀다 공항에 가는 게 전부였다. 여의도의 한 자수정 판매점에서는 무려 1시간 30분을 머물렀다. 폰 지라쁘라디쿨(23·여)은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홍대나 강남에서 놀고 싶었지만 자유시간도 안 줬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가이드는 자수정 반지·팔찌 등 384만원어치의 판매를 도와 이곳에서만 19만원(5%)을 수수료로 챙겼다.

 이들이 3박4일 동안 남이섬·설악산 등 8곳의 관광지에서 보낸 시간은 약속장소에 제때 모이지 않아 지체된 1시간40분을 제하면 7시간. 반면에 11곳의 쇼핑센터에 머무른 시간은 10시간25분이나 됐다.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2013년 한국의 관광경쟁력 순위는 세계 25위에 불과하다. WEF는 “한국이 대부분의 분야에서 발전했지만 관광산업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김철원 학장은 “지금 저가 관광상품은 과거 한국인이 많이 갔던 싸구려 동남아 여행과 흡사하다”며 “저가 관광은 결국 관광객을 감소시키고 국가 이미지까지 깎아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민경원 기자

[관련기사]
"1인당 30~70만원 손해, 손님 싫대도 반강제로…"
싸이 음악에 강남 간 외국인, 전단지 사진에 '민망'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