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냉해가 심각했다. 4200만 섬 쌀을 생산하겠다고 계획했는데 실제 수확한 양은 절반 수준인 2466만 섬에 그쳤다. 10여 년 만의 대흉작이었다. 정권 초기에 흉년이 닥치자 전두환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식량난으로 민심이 나빠질 것을 걱정해서다. 외교력을 총동원해 각국에서 많은 양의 쌀을 수입했다. 결국 쌀 과잉 수입이 문제가 됐다. 당시 양곡 창고 시설이 좋지 않았다. 과잉 수입한 쌀을 기준 이상으로 창고에 겹쳐 쌓아놨다. 그대로 여름을 넘겼다가는 썩어버릴 게 분명했다.
교통부 장관을 하다가 81년 3월 농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당장 과잉 수입한 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을 만큼 농촌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대책이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양곡이 부족한 농가에 쌀 140만 섬을 무이자로 빌려주고 추곡수매 때 갚도록 했다. 수매가 인상폭만큼 농민들의 상환 부담이 줄어들었다. 농가들은 환영했고 여름이 오기 전에 남은 쌀을 모두 처분할 수 있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안정적인 쌀 자급 체제를 갖추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청와대·경제기획원(EPB)·경제학자와 농수산부 간의 전선이 형성됐다. 추곡수매가가 해마다 10%씩 인상되면서 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 문제가 불거졌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비교우위론을 내세웠다. 쌀 자급은 어차피 어려운 데다 외국 쌀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니 수입하는 게 맞는다는 논리였다. 정부 내에서도 쌀 수입론이 우세했다. 농민단체와 일부 학자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외로운 싸움이었다.
80년 냉해로 흉년이 들어 쌀을 수입할 때 세계 곡물 메이저를 통했다. 이들 기업은 국제 시세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폭리를 취했다. 쌀 자급을 하지 않는다면 흉년이 들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될 게 뻔했다.
생각 끝에 ‘쌀 자급 7개년 계획’을 세웠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경제부처 장관이 없는 자리에서 보고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쌀 등 주곡만은 자급해야 합니다. 식량은 안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안보를 세계적인 메이저 양곡 재벌기업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전 대통령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81년 5월 13일 쌀 자급 7개년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86년까지 연간 쌀 4100만 섬을 생산하고 87년엔 자급 목표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목표 시기보다 1~2년 앞서 우리나라는 쌀 자급 국가가 됐다. 물론 벼 품종을 개량하고 1인당 쌀 소비량이 감소해서 가능했다.
고개 하나를 넘었지만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수산부 장관 때 마늘 파동이 일어났다. 마늘은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자 염장 마늘과 같은 마늘 가공식품의 탈법 수입 문제가 심했다.
나는 윤근환 농촌진흥청장에게 다수확 품종을 찾아 도입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중국 하이난(海南)성에서 나는 난지(暖地)형 다수확 품종이었다. 벼를 수확한 뒤 논에 심으면 이모작이 가능했다. 하이난성과 같은 한자를 쓰는 전남 해남과 경남 남해(南海)에 심도록 했고 도입에 성공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늘 파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지금도 식량 자급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최대의 재앙은 식량 부족 사태다. 이미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일이 되면 한반도 전체의 식량 수급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해서라도 주곡 자급을 지켜나가야 한다.
정리=조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