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경제 칼럼

저질 갑을관계는 완장문화의 산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갑의 횡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욕설 사건과 배상면주가 대리점주의 자살이 겹치면서다. 모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을이 반란이라도 일으킨 걸까.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을은 거의 보이지 않고 그 지지자들이 총대를 멨다. 인터넷 시대의 민중이라고나 할까.

 다수에 약한 정치권은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대기업-영업점 간 불공정거래 근절을 위한 입법을 추진키로 했다. 민주당은 새 지도부 출범을 계기로 ‘을을 위한 정당’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6월 임시국회에선 관련 입법이 줄이을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정부 차원의 조치도 예상된다.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 사건은 해당 기업들이 시장을 지키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자사 제품의 소비 감소를 막기 위해 닦달했을 테고, 영업사원은 협력업체와 대리점 사장을 불렀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새로운 문제처럼 부상한 것일까. 대기업의 독식, 부자의 탐욕이 공격받는 가운데 사회를 1대 99라는 불균형·불공평 구도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면서다.

 따지고 보면 경제적 동기가 개입된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갑을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도 그렇다. 조직에서 개인은 대체로 미약한 존재다. 잘리지 않기 위해 하기 싫은 야근도 해야 하고, 술상무 역할도 기꺼이 맡아야 한다. 그런 사람도 거래처에는 갑이다. 작은 흠이라도 잡아 “자꾸 이러시면 거래 못합니다”라고 겁을 준다.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힘들다는 협력업체가 자신의 하청업체는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하다. 고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속담도 같은 이치다.

 오만한 갑을 제거한다? 그건 곤란하다. 갑이 없으면 을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갑을 문제는 경제적 관계의 산물이고, 그래서 간단히 규정하기도 어렵다. ‘갑은 악, 을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재단은 더 많은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정부의 칼로도 쉽게 다스려질 일이 아니다.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상거래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갑을 관계다. 출세하려는 것도 결국 갑의 위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갑이 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갑이 되었을 때 과도하게 지위를 누리려는 태도다. 작은 권한이라도 생기면 행사하려 드는 낡은 권위의식은 지탄받아야 한다. 그런 시대착오적 행태가 문제지 갑을관계 그 자체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다.

갑과 을, 각자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을은 갑에게 납품하고 정당하게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갑은 자신이 을을 먹여살린다고 여긴다. 그래서 을에게 집안의 대소사까지 알린다. 저질 갑을관계는 완장문화의 산물이다. 얌전하던 사람도 완장만 차면 설치는 그런 성향 말이다.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인정할 때 해답은 찾아질 것이다.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