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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미지 먹칠하는 저가 단체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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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외국인 관광객이 지난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중국과 동남아에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K팝 등 한류열풍으로 관광산업은 한국의 ‘블루 오션’이 될 가능성도 보인다. 하지만 관광객만 받고 보자는 주먹구구식 싸구려 관광이 ‘관광 대국’으로의 도약을 가로막고 있다. 본지 취재팀이 관광가이드 아르바이트생으로 저가 여행에 동행해 구조적 요인과 실태를 파헤쳤다.

여의도 벚꽃 축제 간다더니 … 지난달 23일 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강원도 설악수련원 앞 벚꽃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애초 여행사는 여의도 벚꽃 축제가 포함돼 있다고 광고했으나 10분간 강원도 도로변에 머무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인제=민경원 기자]
관광 가이드인지 쇼핑 가이드인지 …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헛개나무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나오는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 손에는 96만원짜리 상품이 들려 있기도 했다. [김성룡 기자]

“손님이 반기지 않지만 수익을 내야 하니 특산물보다 ‘커미션 시스템’이 구축된 곳 위주로 간다.”

 지난 9일 서울 종로의 한 여행사 사무실에서 만난 대표 A씨는 이렇게 털어놨다. A씨는 “일반적으로 1만5000원에 팔리는 불고기를 저가 상품에서는 8000원에 맞춘다”고 했다. 그는 15년간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일본·중국·동남아 관광객을 대상으로 저가 여행 상품을 팔아왔다. A씨는 “숙소 단가를 낮추기 위해 의정부·안산 등 외곽의 모텔을 택할 수밖에 없고 관광지도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곳만 고른다”고 말했다. 그는 “저가 여행은 아시아 관광객이 90%를 차지한다”며 “아시아인은 유럽인과 달리 투어 자체보다 쇼핑에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이런 영업 방식이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복궁 관광은 30분 … 자수정 쇼핑은 90분

 취재팀은 건강식품을 파는 외국인 전용 관광기념품 판매점(미니면세점)에 관광객과 섞여 들어가봤다. 내국인 입장이 차단된 곳이다. 동교동의 H판매점에선 헛개나무 열매 제품 한 통이 48만원에 팔리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한국인삼공사 제품의 가격은 19만6000원. 두 배가 넘는 바가지 요금이었다. 이곳에서 중국인 관광객 옌바오량(50)을 만났다. 뭘 샀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 제품이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는데 한국인도 다 먹는 것 아니냐”며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간에 좋다길래 샀다”고 말했다. 관광지 이동 중간중간에도 가이드는 버스 안에서 김·곶감·딸기 등을 팔았다. 하나를 팔 때마다 3000~1만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일정의 상당 부분을 쇼핑센터에서 허비하다 보니 실제 관광은 겉핥기에 그쳤다. 23일은 남이섬과 설악산, 24일은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대부분 일정엔 30분~1시간30분이 주어졌다. 흩어졌다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을 빼면 잽싸게 ‘인증 샷’을 찍고 다시 버스로 돌아와야 했다. 경복궁·청와대·남산 등 서울 관광을 한 25일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인삼·화장품 등 쇼핑엔 30~40분이 배정돼 있었고 경복궁·청와대·남산 관광은 20~30분 만에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26일 자수정 쇼핑은 90분이나 걸렸다.

상점서 받는 커미션이 유일한 수익원

 숙소가 도심과 떨어진 외곽이었던 것도 일정을 빡빡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서울 관광을 하면서 구로구 독산동의 모텔에서 묵었다. 관광객 잔은 “밤에 자유 관광을 하고 싶었지만 독산동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버스기사 엄모씨는 “대부분 수원·안산 등 경기도에서 묵는 데 비해서는 나은 편”이라며 “일부 모텔은 샤워시설도 훤히 들여다보여 관광객들이 민망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저가 관광이 성행하는 것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여행사 간 출혈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여행사는 관광객을 모은 현지 여행사의 하청을 받는 식으로 운영된다. 관광객이 지불하는 돈은 모두 현지 여행사가 가져간다. 국내 여행사가 여행 경비 자체를 부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 결과 저가 여행사는 관광객 1인당 30만~70만원의 손해를 떠안고 시작한다. 국내 여행사로서는 상점에서 받는 ‘쇼핑 커미션’이 유일한 수익원이다. 한 저가 여행사 관계자는 “커미션을 자제하라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침도 있지만 망하지 않으려면 무시해야 한다”며 “손님이 싫어해도 반강제적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무자격 외국인 가이드 판쳐 역사 왜곡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심원섭 관광정책연구실장은 “저가 관광은 원가도 안 나오는 가격에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현지 여행사와 이를 하청받은 국내 여행사의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한다”며 “관광상품을 개선하려면 해당 국가 정부와 우리 정부가 함께 협의해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자격 관광 가이드가 판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행업체 입장에선 ‘큰손’인 중국인 관광객의 쇼핑을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난 관광 가이드를 선호한다. 중국인은 지난해 1인당 지출경비가 2153달러(약 240만원)로 외국인 관광객 중 가장 많았다. 한 중국 전담 여행사 관계자는 “중국의 황금연휴 기간에 관광객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면 말만 알아들어도 가이드로 쓴다”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 유한순 차장은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가이드를 통한 역사 왜곡도 심하다”고 말했다.

 정작 가이드의 설명이 필요한 곳에서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다. 25일 오후 경복궁 방문을 앞두고 가이드 T는 “ 경복궁에서 가이드 자격증 단속이 심해졌다”며 “혹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나와 동행해달라”고 취재팀에 말했다. 관광지에 들를 때마다 열심히 떠들어대던 T도 무자격 가이드였던 것이다. 이날 경복궁 관광은 25분 만에 끝났다.

크루즈 등 VIP 관광상품 개발해야

 하지만 정부는 현재 활동 중인 관광 가이드가 몇 명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 법이 바뀌어 관광 가이드가 등록을 갱신할 의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자격증을 보유한 가이드는 영어 5295명, 중국어 4033명이지만 이들이 현재 얼마나 활동 중인지는 모른다. 베트남어 가이드로 등록된 경우는 한 명에 불과하다. 지난해 베트남 관광객은 11만 명.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베트남 관광 가이드 한 명이 매일 300명의 관광객을 상대해야 한다. 무자격 가이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은 “중국인이 돈을 많이 쓰면서도 저가로 관광 오는 이유는 쇼핑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며 “크루즈·미식 관광 등 VIP 상품을 개발해 보다 여유 있는 계층의 한국 방문을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정봉·민경원·정종문·손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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