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 추락, 바닥은 어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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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금값이 다시 추락하고 있다. 20일 중국 상하이 등에선 온스당(31.1g) 금값이 하루 전보다 1% 남짓 떨어져 1345달러 선까지 주저앉았다. 2011년 2월 1일 이후 약 2년3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이날 로이터 통신은 “소리 없는 추락”이라고 묘사했다. 금값이 최근 8일(거래일) 연속 별 소동 없이 미끄러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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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금값이 적게 떨어진 게 아니다. 여드레 동안 약 9%나 하락했다. 그 바람에 금값이 지난달 11일 이후의 폭락 때보다 더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의) 금 매도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투자은행 등은 지난달 11일 이후 2~3일 새 금값이 15% 이상 추락하자 “중국과 인도, 주요 중앙은행들이 금을 계속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값이 더 떨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중국·인도 등서 계속 사들여도 못 막아

 로이터 통신은 “거대한 매도 세력 때문에 금값이 짓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로 국제 금시장의 최대 큰손인 ‘금 상장지수펀드(ETF)’들의 매도 공세다. 금 ETF는 최근 10년 동안 금값을 끌어올린 주역이었다. 블룸버그 통신은 “금 ETF들이 이달 들어 무려 241만 온스(약 68t)를 팔아치웠다”고 전했다. 이런 매도 공세 이면엔 ‘헤지펀드의 귀재’인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 같은 세력들의 환매 요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최근 소로스는 보유 중인 금 ETF를 모두 환매했다.

 왜 큰손들이 요즘 황금을 던지고 있을까.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 등은 월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미국 등의 양적 완화(QE)가 인플레이션(통화가치 추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여서”라고 했다. 게다가 ‘미국이 올해 안에 QE를 중단할 수 있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요즘 달러가 강세인 까닭이다. 달러 가치와 금값은 상극으로 통한다.

 WSJ는 “상품투자의 귀재인 짐 로저스 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목청을 높인 ‘화폐 시스템 붕괴’나 ‘달러 위기’가 일어나기 힘든 조건이 강화되고 있다는 게 월가의 진단”이라고 전했다.

‘큰손’ 금 ETF 5월에만 68t 팔아치워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붕괴 우려도 거의 진정됐다. 유로존 경제가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침체이긴 하지만 통화 동맹에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졌다. 게다가 최근엔 미국·유럽·일본 등의 주가마저 강세다. 글로벌 자금이 금 시장을 탈출해 주식으로 이동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자산 가격이 흔들리면 시장엔 꼭 나타나는 세력이 있다. 바로 ‘늑대무리(Wolf Pack)’다. 공매도(Short Selling) 세력이다. 지난주 말 현재 글로벌 금시장에 쌓여 있는 공매도 물량이 8만 건 이상이다. 지난달 말보다 30% 가까이 늘어났다. 이들이 금을 빌려 팔아놓고 있는 규모다. 그만큼 금값을 누르는 압력이 크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쯤되자 금 대세상승이 끝났다는 진단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투자전문지인 알파는 “뉴욕·런던 등 주요 금거래소 주변에선 ‘황금 수퍼사이클(Gold Supercycle)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고 전했다. 수퍼사이클은 자산 가격이 장기간 오르는 국면이다. 금값은 2001년 3월부터 2011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이 대세상승 국면이었다. 그 사이 금값은 250달러 선에서 1900달러로 7배 이상 올랐다. 알파는 “금값이 2011년 9월 정점에 도달한 뒤 2년 정도 동안 1500~1800달러 사이에서 오르내렸다”며 “주요 중앙은행들이 머니 프린팅(QE)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많은 투자자들이 금값 붕괴는 없을 줄 알았다”고 했다.

위기 때 최후의 보루 황금신화 흔들

 그들의 기대는 지난달 11일 깨졌다. 그날 하루 금값이 13% 추락했다. 버블 양상을 보인 자산 가격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라는 진단이 제기됐다. 이는 미국 경제학자 고(故) 허먼 민스키가 처음 밝혀낸 현상이다. 그는 “급락 이후 자산 가격은 일시 반등하기도 하지만 버블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요즘 다시 금값이 떨어지고 있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금값이 주저앉으면서 ‘금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리고 있다. 일반 투자자들은 금으로 전쟁, 천재지변, 경제 위기, 인플레이션 등의 충격을 회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 존 메이너드 케인스 영국 경제학자 등이 환상이라고 지적한 믿음이다.

미·일·유럽 주가 강세 … 뭉칫돈 요동

 버냉키 의장은 2010년 미 의회에 출석해 “금은 돈이 아니다”며 “현대 화폐는 금과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돈이 금에서 유래했다는 통념을 비판한 말이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금 소유욕을 “야만 시대 유습(Barbarous Relic)”이라고 했다.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습관이란 얘기였다. ‘가치 투자의 아버지’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금엔 배당이나 이자가 없다”며 “금을 산 사람은 순전히 가격 상승만을 노려야 하기 때문에 금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 대상”이라고 말했다.

특히 버핏은 금값이 치솟던 2011년 “대중이 황금 환상에 취해있다”며 “금은 투자 대상이나 헤지 수단이 아니다”고 경고했다. 이는 1980년대 서방 중앙은행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진단이었다.

 당시 독일·영국 등의 중앙은행들이 80년 값이 치솟자 금 매수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하지만 금값은 그해 1월 이후 가파르게 떨어졌다. 그 바람에 중앙은행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90년 이후 금 매도에 나섰다. 그 바람에 당시 금 시장은 10년 동안 침체에 빠졌다.

 요즘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 등의 중앙은행들이 2011년 이후 금을 대거 사들였다. 그 손실 규모가 총 5600억 달러(약 620조원)에 이른다. 금값이 더 떨어지면 중앙은행들도 견디기 힘들어질 수 있다. 최근 스위스계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는 “올해 안에 금값이 1100달러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금 ETF에 이어 중앙은행들마저 매도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강남규 기자

◆금 ETF(Exchange Traded Fund·상장지수펀드)

국제 금값 등락률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수익률이 결정되는 펀드. 투자자들이 금덩이를 직접 사서 보관하지 않아도 금 투자 효과를 누리도록 만들어졌다. 2003년 처음 월가에 등장해 금 투자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특히 연·기금들이 금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었던 이유다. 덕분에 2003년 이후 글로벌 금시장엔 역사상 가장 많은 자금이 몰려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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