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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아베, 마루타의 복수를 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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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신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의 악행을 징벌하곤 한다. 가장 가혹한 형벌이 대규모 공습이다. 역사에는 대표적인 불벼락이 두 개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독일 드레스덴이 불에 탔다. 6개월 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들 폭격은 신의 징벌이자 인간의 복수였다. 드레스덴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복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였다. 특히 731부대 생체실험에 동원된 마루타의 복수였다. 똑같은 복수였지만 결과는 다르다. 독일은 정신을 바꿔 새로운 국가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본은 제대로 변하지 않고 있다.

 2006년 나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유대인 100여만 명이 가스실에서 처형됐다. 모든 게 끔찍했지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가스실 벽면에 남겨진 손톱자국이다. 독가스가 퍼지자 유대인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고통 속에서 그들은 손톱으로 시멘트 벽을 긁었다.

 다른 하나는 형벌 방이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누울 수 있는 방에 4~5명을 가둬두었다. 유대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지쳐서 죽어갔다. 그들은 손톱으로 벽면에 글자를 새겨두었다. 가장 많은 단어가 ‘god(하나님)’이다.

 나치 히틀러의 악행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영국과 미국은 드레스덴 공습을 결정했다. 군수공장이 있었지만 드레스덴은 기본적으로 문화·예술 도시였다. 르네상스 이후 자유분방한 바로크 건축미술이 꽃을 피운 곳이다. 3일 동안 폭격기 5000대가 폭탄 60여만 개를 투하했다. 화염 폭풍이 도시를 삼켰다. 시민들은 불에 탔다. 어른은 어린이, 애기들은 병아리처럼 오그라들었다. 모두 3만5000명이 죽었다.

 만주 하얼빈에는 731부대 유적이 있다. 박물관에는 생체실험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실험 대상은 마루타(통나무)라 불렸다. 진공 속에서 몸이 뒤틀리며, 세균 주사를 맞고 서서히, 묶인 채 폭탄에 가루가 되면서 마루타는 죽어갔다. 최소한 3000명이 실험에 동원됐다. 중국·러시아·몽골·한국인이었다.

 마루타 비명이 하늘에 닿은 것인가. 45년 8월 원자폭탄 열 폭풍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덮쳤다. 가스실 유대인처럼, 마루타처럼, 작두로 머리가 잘렸던 난징 중국인처럼 일본인도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방사능 피폭까지 합치면 모두 20여만 명이 죽었다.

 불벼락은 국가를 개조하고 역사를 바꿔놓았다. 드레스덴 공습 25년 후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 날이었다. 그 후 독일 대통령과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과거에 대한 추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독일 검찰은 최근 아우슈비츠 교도관을 지낸 90세 남성을 체포했다.

 그런데 일본은 다르다. 어떤 지도자들은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사람이 위안부는 필요한 것이라고 버젓이 말한다. 아베는 웃으면서 731 숫자가 적힌 훈련기에 올라탔다. 그 숫자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있는지 그는 모르는가. 아베의 언행은 인류 이성과 양심에 대한 생체 실험이다. 이제는 아예 인류가 마루타가 되어버렸다.

 아베는 지금 환각에 빠진 것 같다. 엔저 호황과 일부 극우 열기에 눈이 가려 자신과 일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인류의 길고 깊은 지성에 도전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의 행동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신에게도 자유가 있다. 마루타의 원혼(寃魂)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일본에 대한 불벼락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신의 자유일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본 칼럼에 대해 중앙일보 서경호 대변인은 "김진 논설위원 개인의 시각과 주장이며, 중앙일보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