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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세상탐사

윤창중이 진정 고마운 이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지난주 수요일 저녁, 가까운 친구들과 만났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으로, 다시 성희롱 문제로 옮겨갔다.

 “얼마 전 회식을 했는데 내가 술에 취했는지 옆에 앉은 여직원 다리를 툭툭 쳤나 봐. 다음날 동료가 주의하라고 얘기해주는데 얼마나 아찔하던지….”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구속복 있잖아. 흉악범에게 입히는 옷. 우리도 술 마실 때 그런 구속복 입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옆으로 손을 뻗을 수 없게.”

 “솔직히 문제는 술이 아니라 잘못된 습관, 잘못된 문화지. 이제껏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의식이 별로 없었잖아.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이러다간 성희롱한 남자들 몽땅 삼청교육대 보내라는 말이 나올지 누가 아냐고.”

 불콰해진 얼굴에 불안감이 일렁인다. 그렇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 방미의 최대 성과는 한국 사회의 성(性) 의식을 바꾼 데 있는지 모른다. 특히 여성들의 울분이 폭발하고 있다. 한 여성은 페이스북에 “윤창중이 기억 속에 깊이 묻어놨던 성희롱의 개인사를 들춰냈다”고 적었다.

 “윤창중에게 갑자기 고마워지려 한다. 이렇게 크게 사고 쳐줘서. 식겁하게 만들어줘서. 여성 지위 100위 권 밖에서 100위 권 안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온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진통을 겪고 넘어가야 하는 건지도….”

 그가 쓴 일련의 글엔 “굳이 쓰자면 한 바닥이죠” “백과사전 한 질 ㅋㅋ” 같은 여성들의 공감이 댓글로 달렸다. ‘남자들이여, 이젠 정신 좀 차리라’는 개탄이다.

 남성들은 움츠리는 분위기다. “여성 동료들 앞에서 언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심스럽다” “농담 한번 잘못 뱉었다가 나쁜 놈 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남성 중심 사회에 길들여진 40대 이상에선 그 정도가 심하다. 성장 과정에서 여성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남자 중·고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서도 같은 과에 여성이 드문 경우가 많았다. 여성은 어머니나 누나·여동생 같은 가족이 아니면 이성(異性)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여성 동료나 후배가 순수하게 호의를 보일 때도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이러한 착각은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물론 많은 남성이 분별력을 잃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이 적지 않은 것 또한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세상사에 통달한 대학 친구는 동기들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보다 열 살 많은 여자가 이성으로 다가오니? 아니잖아. 한번 거꾸로 생각해봐. 여자들도 10년 연상의 남자가 뭐가 좋겠냐고. 너희가 서태지야? 현빈만큼 잘생겼어? 아니면 돈이 많아?”

 이 친구처럼 정신 차린 남자가 늘기 시작한 것은 긍정적인 조짐이다. 돌이켜보면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든 성폭력 사건들은 거대한 변화의 전조(前兆)였다. 양성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변화의 전조. 그 변화를 추동하는 핵심 에너지는 수백 년, 수천 년간 남성에게 억눌려온 여성들의 분노다. 올 들어서도 고위 공직자 성접대 의혹부터 대법원의 ‘부부 강간 유죄’ 판결까지 주요 사건들이 성 문제와 관련돼 있다. 이번에 터진 ‘윤창중 사건’은 청와대 권력 메커니즘의 맹점을 보여준 것이지만 한편으론 뿌리 깊은 남성 중심 문화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는 방증일 수도 있다.

 변화엔 성장통(成長痛)이 따르기 마련이다. 일시적인 부적응 현상도 나타난다. 중년 남성들이 어찌할 바 몰라 갈팡질팡하는 게 그중 하나일 터. 하지만 조정 과정을 거치면 남녀공존시대는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그점에서 보다 절실한 것은 청와대 ‘금주(禁酒)선언’이나 성희롱 예방교육이 아니다. 바로 인권교육이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곤경에 놓이지 않는 기술을 가르치지만 인권교육은 여성과 남성이 왜 서로를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지, 기본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왜 다른 사람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고, 어떻게 말하는 게 제대로 된 소통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윤창중씨가 강호를 떠돌던 시절 ‘정치적 창녀’ 운운했을 때부터 그의 의식은 밑바닥을 드러냈다. ‘창녀’란 단어는 특정한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를 ‘창녀’라고 불러선 안 된다. 제2, 제3의 윤창중 사건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인권의 등불부터 밝혀야 한다. 그게 이번 사건이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이고, 우리가 진정 윤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다.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 sc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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