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만 콕 찍어 독립 보장…70년 전 루스벨트·처칠·장제스 그들은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1943년 이집트에 모인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카이로선언은 한국 독립을 여는 문이었다.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이 전후 국제질서를 구상한 카이로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선언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구가 포함됐다.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과정을 통해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했다.

세 차례 편지 보내 루스벨트 설득

유영익 교수

 제2차 대전 때 한국만 약소 식민국이지 않았다. 수많은 식민지 중 유독 한국을 지목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는 표현까지 보태며 독립을 보장한 배경이 무엇일까. 그것도 가장 높은 단계의 국제협약으로 꼽히는 공동선언에 한국이 언급된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올해 카이로선언 70주년을 맞았다. 한국 독립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카이로선언의 수수께끼가 풀려나갈 조짐이 보인다. 유영익(77) 한동대 석좌교수는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역할을 지목했다.

 11일 만난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 탄생의 가장 큰 한국인 공로자는 이승만”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 그간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던 흐름을 뒤집는 발언이다.

 유 교수는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비록 상하이 임시정부와 하와이 교민사회를 원만히 이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 행정부를 향한 전방위적인 외교 노력으로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내는 숨은 공을 거뒀다”며 “이승만이 1919년부터 45년까지 끈질기게 전개한 외교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실속 있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카이로선언의 외국인 공로자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다. 유 교수는 이번 주 초 배포될 신간 저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일조각)에서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새롭게 조명했다.

 - 카이로선언의 의미는.

 “카이로선언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은 아마 요원했을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할 때까지 한국을 자신들 영토에 남겨두려 했다.”

 - 전후 한국의 독립 보장 문구는 장제스 총통이 넣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의 한 연구성과에 의하면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제기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고, 카이로선언 초안 작성자도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였다. 정일화 박사가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선언』(2010)에서 밝혀낸 획기적 성과다.”

 - 한국이 독립과 관련된 결정적 계기조차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장제스는 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 도중 한국 문제를 공식 거론한 일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11월 23일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거론하자 이에 장제스는 수동적·소극적으로 찬성했다.”

일제만행 고발 등 전방위 외교전

이승만

 - 루스벨트와 홉킨스는 어떻게 한국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그 과정을 이번 책에서 살펴봤다. 당시 국제정세를 되돌아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홉킨스에게 영어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할 사람은 이승만 외엔 없다. 카이로선언 이전 이승만은 적어도 세 차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1941년 8월 펴낸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엘리너 여사에게 보낸 사실도 기억돼야 한다.”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에 미친 이승만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했다. 우선 ‘편지 외교’다. 유 교수가 가장 주목한 것은 43년 5월 15일자 편지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해 1905년과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운 일을 상기시키면서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불행한 사태가 확산된 것은 서양의 정치가들이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5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회답이 온 것으로 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봤거나 아니면 적어도 홉킨스가 검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 편지에 앞서 펴낸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1905년부터 일본의 한국 병탄을 허용한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일제가 105인사건(1912)과 제암리사건(1919)을 일으켜 한국의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한 진상을 폭로했다.

‘백년전쟁’같은 친일논쟁 끝내야

 - 외교적 로비는 어떤가.

 “이승만은 1942년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를 결성해 워싱턴에서 활발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됐다.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서명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루스벨트와 홉킨스에겐 무시 못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동영상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친일파라 했다.

 “언급할 가치도 없다. 카이로선언과 이승만의 외교독립 활동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백년전쟁’ 같은 불필요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배영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