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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에 넘칠 듯 담아낸 다이토쿠지<大德寺> 수월관음도 해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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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호 26면

저자: 강우방 출판사: 글항아리 가격: 3만5000원

도자기 등 공예품에서 고사리나 식물의 넝쿨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반복 곡선 장식 모티브를 흔히 ‘당초문(唐草紋)’이라 부른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강우방(72)은 이 명칭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이 문양을 ‘영기문(靈氣紋)’이라 명명하고 10여 년간 그에 담긴 우주와 생명의 생성에 관한 이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왔다. 『수월관음의 탄생』은 그가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텍스트 삼아 자신의 이론인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의 확대 전개를 시도한 책이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의 『수월관음의 탄생』

저자가 택한 것은 현존하는 40여 종의 수월관음도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고 예술적 표현이 풍부하다고 여겨지는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본. 아직 논문 한 편 없는 텍스트지만, 연구 방법론이 새롭다. 일반적인 미술읽기는 작가론이거나 작품의 양식을 따지고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도상을 해석하는 것이 보통. 작품 자체에 드러난 구조나 의미·상징들의 관계를 치밀하게 읽어내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런데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틀어 한 작품의 해석에 바쳤다.

저자만의 독특한 방법론은 ‘조형해석학’이다. 집요할 정도로 미시적인 관찰을 통해 숨겨진 조형의 구조와 거기에 내재하는 상징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이 조형의 성립 과정을 단계적으로 밝히는 실증적 작업이 ‘채색분석법’. 역시 저자만이 시도하고 있는 독특한 분석도구다. 화폭에서 중요한 장면의 윤곽선을 먼저 따낸 뒤 특징적인 부분을 눈에 잘 띄는 채색으로 구분해감으로써 오래된 화면을 분명하게 인식함은 물론 그려진 순서와 영적(靈的) 장면이 형성되는 시간적 순서를 역추적하는 방법이다.

이런 치밀한 실증 작업을 통해 그가 밝히고자 한 것은 영기문이 ‘생명 생성의 과정’을 표현하는 근원적인 의미를 내포한 문양이란 사실이다. 수월관음도의 가장 아랫부분에 그려진, 괴수가 든 만병(滿甁)에서 비롯된 연기 모양의 영기가 물결 무늬로 갈라지고 다시 연꽃으로 모아져 관음보살의 발 아래 이르면, 비로소 관음보살의 몸을 타고 영기화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곧 관음보살의 신체 자체가 영기의 집적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뜻한다.

장대한 화폭 전체를 하나의 도상의 반복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독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꼼꼼하게 제시된 채색분석 도면을 따라가며 통상 식별이 어려운 고려 불화가 한 뿌리에서 시작된 곡선의 연속과 반복임을 확인하게 될 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석가여래의 곱슬머리가 영기문의 집적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무릎을 치게 된다.

그리스 정교의 성모자상과의 비교를 시도한 3부에 이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평면 회화에 머리와 옷자락을 따라 릴리프된 진주 알갱이들은 관음도의 보주(寶珠)와 다르지 않다. 액자 프레임을 비롯해 그림의 여백과 광배, 인물의 옷자락 등으로 가득 메워진 장식 문양은 영기문에 해당한다. 바탕의 영기문에서 마리아와 아기예수가 영기화생한다는 원리다. 이 그림이 다름 아닌 성모자상이란 점에서 ‘생명의 근원’을 논하고 있음도 일치한다.

이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획기적인 발견으로 보인다. 종교화에 나타난 동서양 우주생성에 관한 사상의 일치라는 측면에서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인식해온 동서양 조형미술에 놀랍도록 같은 표현 원리가 있었다는 측면에서나, 지속적으로 연구돼야 할 흥미로운 미술사적 주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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