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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아라비아사막 엠티쿼터 1000㎞ 횡단 … 39일간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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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단일 규모의 모래사막으로는 세계 최대인 아라비아사막 엠티쿼터 도보 횡단은 2월 18일 오만 남서부 살랄라에서 시작됐다. 해발 900m의 도파산맥으로 둘러싸인 150㎞의 협곡을 5일 만에 이동했다. 낮엔 섭씨 35도를 웃돌았지만 밤이면 0도 가까이 떨어졌다. 원정대는 모닥불로 몸을 녹였고, 비스킷으로 아침을 때운 뒤 낮 동안 끝없는 평지를 걸었다. 시사르에서 잠시 몸을 추스른 원정대는 2월 24일 본격적인 엠티쿼터 횡단에 돌입했다. 사막의 사구는 300m 넘게 솟아 있었다. 동행했던 아랍인이 횡단 사흘 만에 현기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물이 부족해 모두 입술만 축여야 했다. 그렇게 8일. 원정대는 드디어 베두인 마을에 도착했다.

3월 23일 해질 무렵 이시우 대원(왼쪽)과 아구스틴 대원이 아랍에미리트의 사구를 넘고 있다. [사진 2013 엠티쿼터 원정대]

3월 3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원정대는 오만 엠티쿼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만다르 알다비안(좌표 N19°50’02”, E54°31’37”)에 도착했다. 수십 개의 사구를 넘은 뒤였다. 이곳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 1㎞밖에 떨어지지 않은, 그야말로 ‘사막 속 외딴 마을’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마을엔 초등학교와 모스크가 있었고 같은 모양의 흰색 단층 주택이 10여 채 서 있었다.

 1940년대 아라비아사막을 탐사했던 윌프레드 세시저는 저서 『아라비아사막』에서 “사막에서는 말이 바람을 타고 사구를 넘어 금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고 썼다. 이를 입증하듯 마을 입구엔 그새 소식을 접한 주민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줄지어 서 있는 베두인(예부터 중동의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해온 아랍인)은 어림잡아 40명. 물론 모두 남자뿐이었다. 여자들은 낯선 손님이 오면 집 안에 머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관습이었다. 원정대가 마을에 다가가자 총을 든 두 남자가 하늘로 실탄을 발사했다. 잠시 긴장했지만 알고 보니 환영한다는 뜻이란다.

 그들은 먼저 낙타에게 물을 먹였다. 베두인에게 낙타는 단순한 가축 이상의 특별한 존재다. 척박한 사막에서 젖과 고기와 운송 수단을 제공해주니 낙타가 없는 베두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마을에 들어서자 천막에는 푸짐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음악도 흘러나왔다. 남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 전통춤을 추기 시작했다. 늘 들고 다니는 지팡이와 칼을 손으로 돌리며 걷는 춤이었다. 우리에게도 권해 한두 번 춰봤지만 처음 접하는 아랍의 리듬과 춤사위는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함께 즐기며 반기는 마음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베두인 마을 총성에 긴장 … 이방인 환영식

 이틀 밤을 마을 사람들과 보낸 뒤 다시 모래언덕으로 향했다. 떠나는 우리 배낭엔 신선한 물과 과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베두인 음식이 들어 있었다. 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해준 선물이었다. 그들은 사막에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만난 이들에겐 넉넉히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막에선 누구나 친구가 돼야 함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만의 엠티쿼터가 끝나는 지점까지는 약 300㎞ 남아 있다. 사구의 높이는 점차 낮아졌지만 더욱 조밀해졌다. 간혹 나타나는 평지도 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밟아보면 푹 꺼지며 뿌연 먼지가 치솟는 아주 고약한 땅이었다. 마을을 떠난 지 이틀째인 3월 6일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알리는 경계석이 수㎞마다 설치돼 있지만 그 사이엔 철조망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두 나라를 넘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1000㎞ 넘게 사막뿐인 이곳을 어느 누가 건너려 할까. 사람 눈에 띄기도 전에 죽음에 직면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이튿날 함께 동행한 베두인 모하마드는 평소보다 무척 힘들어 보였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에서의 사막 횡단은 정신력만으론 결코 가능하지 않다. 경험과 의지, 냉철한 판단력이 모두 필요하다. 사막의 열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면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된다.

낙타도 평소 같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을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럴 때면 베두인도 낙타 그늘에 몸을 숨겨 휴식을 취했다. 보통 오후 7시면 끝나야 할 일정이 해가 지도록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 때론 오후 9시 넘게까지 사막의 밤을 걸어야 했다.

유전캠프가 오아시스 … 과일·야채 포식

① 2월 28일 오만의 엠티쿼터를 지나는 아구스틴. 오전 6시30분 해가 뜨면 원정대의 발걸음도 시작된다. ② 만다르 알다비안에 도착한 3월 3일 동행했던 모하마드가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포즈를 취했다. ③ 3월 3일 오후 만다르 알다비안 주민들은 먼저 낙타에게 물을 먹이도록 했다. 그만큼 낙타는 사막에서 소중한 존재였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막의 밤은 쏟아지는 별빛만으로도 아름답지만 걷는 우리는 수많은 별빛 중 하나조차 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긴장해 있었다. 밀려오는 피로감과 졸음을 이겨야 했고 내가 가는 방향을 잃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며칠간 낮엔 폭염, 밤엔 영하에 가까운 한기 속에서 하루 40㎞씩 모래밭을 걸었다.

 3월 9일 드디어 원정대는 샤흐마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인 이곳이 이름을 가진 건 마을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전캠프 때문이었다. 회사 관계자의 환대로 식당과 숙소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일주일간 온몸과 장비에 쌓인 모래를 털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땀과 모래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씻는 것도 오랜만에 누리는 행복이었다.

무엇보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맘껏 섭취할 수 있다는 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반가운 일이었다. 늘 동결 건조식품과 물로만 하루 세 끼를 버티다 배변의 고통까지 겪던 대원들에게 가장 그리운 건 갓 요리한 음식과 신선한 채소류였다.

 캠프에는 여섯 바퀴가 달린 큰 트럭을 타고 여행하다 사구에서 전복 사고를 당한 유럽인 남성 두 명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2년 전 낙타를 타고 이 길을 지났던 영국인 탐험가 에이드리언 헤이스도 이곳에서 며칠간 쉬어갔다고 했다. 옛날 같으면 기댈 곳 없는 사막이었겠지만 이젠 유전이 또 다른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걸어서 못 간 UAE 구간 하루 전 허가

④ 전통에 따라 주민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마을로 안내했다. 큰어른이 가운데 서서 행렬을 이끌었다. ⑤ 같은 날 저녁 손님을 위한 베두인들의 만찬. 젊은 남성들이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⑥ 3월 7일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국경 경계석. 한쪽 면엔 오만, 다른 한 면엔 사우디아라비아라고 적혀 있다. ⑦ 3월 18일 원정대가 엠티쿼터의 사구를 힘겹게 오르고 있다. 낙타들도 지쳐 몇 번을 주저앉곤 했다. ⑧ 3월 19일 오만 엠티쿼터에서의 마지막 밤. 원정대원들은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800㎞. 3월 19일 오후 3시까지 걸어온 거리다. 오만과 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 등 세 나라가 만나는 국경에 도달했다. 사구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우린 견고하게 둘러쳐진 철조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건 새와 바람과 소리뿐이었다. 움 아즈 자물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사막 속의 또 다른 사막’이었다.

 사막이 지옥 같을 때가 있다.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할 때,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때, 모래바람이 온몸을 덮칠 때, 새벽녘 지독한 추위와 갈증을 느낄 때, 그리고 피해갈 수 없는 엄청난 높이의 사구를 건널 때다. 원정대에 이 지역은 정말 지옥 같은 곳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모래언덕을 넘어 ‘이젠 시험문제를 다 풀었나’ 싶을 때면 여지없이 또 다른 사구가 앞에 버티고 있었다. 철책선 너머 아랍에미리트 쪽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넘실대는 모래 파도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시야 저 너머까지 일렁이고 있었다.

 오만에서의 마지막 밤은 여느 때와 달리 무척이나 고요했다. 몇 달간 요청했던 아랍에미리트 구간의 탐사 허가도 하루 전에 극적으로 나온 터였다. 현지 부지사와 한국대사관의 헌신적인 협조가 큰 힘이 됐다. 3월 22일 우리는 그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던 아랍에미리트 쪽 엠티쿼터에 발을 내디뎠다. 지구상에서 가장 은밀히 감춰져 있던 곳의 자물쇠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오만의 사막은 드넓은 평지 위에 사구가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는 반면 아랍에미리트에서는 거대한 사구들이 숨쉴 틈 없이 눈앞에 다가왔다. 헤이스는 그의 원정기록에서 “아랍에미리트 사막에서는 하루에 10~15㎞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적었다. 하루 평균 35㎞를 이동해온 우리는 설마 했다. 하지만 실제 며칠을 경험해보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래로만 이뤄진 사구에서 직선거리로 30㎞를 이동하기 위해선 최소한 40㎞ 이상 걸어야 했다. 거기에 열 발짝을 올라서면 다섯 발짝은 뒤로 밀려나니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피로가 몰려왔다.

 그때까진 별 이상이 없던 내게도 종아리에 심한 경련이 일어났다. 감각도 무뎌졌다. 가장 체력이 좋은 이시우 대원은 목 통증이 심해 사흘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구스틴 대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바닥 통증이 더욱 심해져 걷기조차 힘든 상황에 처했다. 모두들 발바닥 살갗이 서너 번씩 벗겨지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푹푹 빠지는 발 … 40㎞ 가면 실제론 30㎞

원정의 끝자락에 와 있었지만 사막은 갈수록 거세게 우릴 밀어붙였다. 도중엔 그 어떤 마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긴 뿔이 달린 영양의 일종인 오릭스를 만난 게 유일한 생명체였다. 그야말로 엠티쿼터, 텅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멈춰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뚫고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100㎞의 모래언덕을 넘고 나서야 한 마을에 닿았다. 대추야자 농장 주인은 우릴 위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넓은 쟁반 위에 전통요리인 양고기를 내왔는데 양의 머리와 몸통·다리가 통째로 올려져 있었다.

음식을 나누는 방법은 더욱 독특했다. 손님의 대표가 양의 두개골을 갈라 그 안에 있는 뇌를 밥 위에 쏟아내 맛을 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이 잘못됐거나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쉽게 손이 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호의에 실례가 되고 싶지 않아 나도 그 방식을 따라 했다. 현지인들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게 소통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이제 종착지인 리와 메자이라까지는 100㎞. 어느덧 사구는 저 멀리 비켜가고 오아시스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저녁이면 인근 마을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3월 28일. 총이동거리 1000㎞. 아라비아해 항구도시 살랄라를 출발한 지 39일 만에 드디어 목적지에 닿았다. 세계 최초로, 오로지 걸어서 엠티쿼터를 횡단하는 꿈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남영호 원정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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