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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을 버려도, 본업만 해도 망해" … '캡틴 킴' 바다에서 배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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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꽉 막힌 고속도로에선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바다의 개척자’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은퇴 후엔 교육사업에 힘쓸 생각이라고 했다. [김현동 기자]

원양어선 실습항해사로 출발해 참치 캔 제조회사 사장으로 성공한 뒤 증권업계 진출까지. 김재철(78) 동원그룹 회장의 기업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지금 그룹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동원산업·동원F&B·동원시스템즈 등 16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의 수장이다. 1969년 설립한 동원의 지난해 매출은 4조원을 넘는다(2003년 계열 분리된 한국투자금융지주의 3조2000억원을 포함하면 약 7조4000억원). 그 시작은 참치 원양어업이었다. 김 회장이 44년 전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세운 동원산업은 지난해 779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의 창업기업가 멘토 스쿨 강연을 마친 그를 만나 반평생 바다와 함께 살며 체득한 그만의 경영철학을 들어봤다.

원양어선 타며 ‘캡틴 킴’으로 신뢰 쌓아

세계경영연구원에서 예비 창업가들을 대상으로 기업가 정신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김재철 회장.

 전남 강진군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잘 했다. 서울대 농대 장학생으로 입학할 예정이던 그는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 말씀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요. ‘바다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잘살려면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 나처럼 서울대 나와 봐야 너희와 입씨름밖에 더 하느냐’고 하셨죠.” 그 길로 바다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을 알아본 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어로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집에서는 왜 좋은 대학 놔두고 뱃놈이 되려고 하느냐며 야단이었어요. 아버지는 ‘반찬은 직접 고기를 낚아 해먹으라’며 쌀만 보내셨죠.”

 그러던 중 57년 제동산업이 한국 최초로 참치잡이 원양어선 ‘지남호’를 띄우기로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아, 이거다! 싶었어요. 마침 그 회사 사람이 부산에 왔다길래 양담배 사 들고 찾아갔는데, 국가적 이벤트에 어디 풋내기 대학생이 명함을 내미느냐며 무시당했어요. 지도교수도 같이 사정해도 꿈쩍 안 했죠.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무보수에 죽어도 탓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승선 허가가 떨어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오고 군악대가 팡파르 울리며 부산 제3부두에서 요란하게 출항했어요. 실습항해사 신분이라 ‘학생’ 하고 부르면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해야 했죠. 그렇게 23일 걸려 남태평양 사모아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참치잡이 배가 아닌 거예요. 미국에서 들여온 배를 수리한 건데, 미리 와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본 배들을 보고서야 깨달았죠.” 장비 다루는 법조차 몰랐지만 온 국민의 기대를 받고 떠난 터라 빈 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새벽마다 깊은 바다에 낚시를 드리웠다.

 그는 일본 배가 잡은 고기를 보며 참치 생김새를 익혔다. 어류도감을 독파하며 값어치 없는 고기를 골라냈다. 우여곡절 속에 지남호는 1년 만에 복귀했다. 이 전 대통령이 지남호가 잡아온 참치를 각국 대사들에게 자랑하는 게 대서특필됐다. 그 정도로 수산업이 낙후된 때였다.

 지남호 출항 이후 원양어선을 짓는 곳이 많아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2개월을 항해사로 지낸 그는 최연소 선장에 발탁됐다.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일 때 월급이 100달러였다. 부산시 남포동 술집이 뱃사람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최고 어획고를 올리자 ‘캡틴 킴’이면 믿을 만하다고 소문도 났다. 30세에 그는 당시 최대 규모의 수산회사에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향했고, 1년 뒤 돌아와 이사가 됐다.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69년 일본 도쇼쿠사로부터 3년 뒤 고기를 잡아 배 값을 갚는 조건으로 배를 빌려 동원산업을 설립했다. 그는 창업 3~4년 만에 배를 6척으로 늘리는 등 앞만 보고 달렸다. 두 차례 오일쇼크로 수산회사들이 잇따라 무너질 때도 그는 오히려 규모를 키우며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불황을 넘기 위해 새 배를 건조했다. 금융기관의 지불보증 없이 미쓰비시상사와 6년 분할 계약으로 4300t급 동산호를 바다에 띄웠다. 캡틴 킴으로 20년 가까이 쌓은 신뢰가 바탕이 됐다. 2차 오일쇼크 때는 직접 배에 몸을 실었다.

“은퇴 후엔 교육사업에 힘쓸 것”

 바다에선 캡틴 킴으로 통했지만 육상 네트워크는 부족했다. 단점을 메우려고 80년대 초 고려대·서울대 경영대학원 과정에 다녔다. 미국 유학이란 새로운 도전도 감행했다. 하버드대 MBA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한 그는 또 한번 ‘아, 이거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참치 캔 생산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 캔을 사먹는다는 이론이 있다는 거예요. 그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200~1300달러였죠.”

 MBA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82년 동원참치 생산을 시작했다. 출시 가격은 당시 돈으로 1000원. 짜장면 한 그릇보다 훨씬 비쌌다. 하지만 남대문시장에서는 미국 유학생들이 3800원을 주고 사먹던 제품이었다. 동원참치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건 88 서울 올림픽부터다. “그땐 참치 캔이 막 공장에서 나와 따뜻한 채 팔려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김 회장은 미국에서 또 하나 새로운 발견을 했다. “80년대 한국에선 증권회사라고 하면 산업이 아니라 장사치나 하는 걸로 여겼어요. 그런데 미국에선 어딜 가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증권회사로 가더군요.” 마침 정부가 한신증권 입찰을 했다. 동원은 입찰가 71억2000만원에 낙찰받으며 증권업에 진출했다. “당시 원양어업 하던 회사가 증권회사를 낙찰받았다고 한참 떠들썩했죠. ”

 회사를 낙찰받았지만 금융에 대해선 아는 게 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인재를 모으기가 어려웠다. 그는 인센티브제 도입과 직원교육 강화로 승부수를 던졌다. “선장이 선원 훈련시키듯 했으니 하드 트레이닝이었죠.” 이후 동원증권은 증권사관학교로 불리며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비롯해 김정태 전 KB국민은행장, 최현만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장인환 KTB자산운용 대표,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 등이 동원증권 출신이다. 2005년 동원증권이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면서 지금의 한국투자금융지주가 탄생했다.

 김 회장은 요즘 자신의 창업 경험을 젊은 창업가들에게 전해주는 데 열심이다. 그는 “창업하려면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뛰어들라”고 조언했다. 또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옆에 두고, 부하에게는 절대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걸 ‘치마 이론’이라고 하는데, 치마는 밑에서 보면 다 보이잖아요. 마찬가지로 부하직원은 리더가 거짓말을 하면 다 압니다. 그만큼 리더는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는 2남2녀를 엄하게 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대학 졸업 후 6개월 동안 남태평양에서 참치잡이를 했다. 회장 아들인 것도 숨기고 궂은 뱃일을 도맡게 했다. “물론 마음이 아팠죠. 아내는 매일 아들 걱정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요. 하지만 직원들의 노고를 알려면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며 경험해 볼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차남인 김남정 부사장도 참치 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시작해 영업부 평사원 등을 거쳤다. 김 회장은 자녀들에게 “좀 손해 보며 살아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고스톱을 쳐도 내가 좀 잃어줘야 같이 치려 하지, 절대 손해 안 보려 하면 누가 치려고 하겠어요.”

 김 회장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재미있겠다”고 느꼈다고 한다. “재미있다는 영어 단어가 ‘interest’인데 ‘이익’이라는 뜻도 되죠. 단순히 재미있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돈이 될 만한 걸 미리 알아채는 게 중요해요.” 평생을 바다에 쏟은 그는 은퇴 후에는 교육사업에 힘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해 장학금 지급과 유아 독서 지원사업 등을 꾸준히 펼쳐왔다.

 70년대 30곳을 웃돌던 원양업계는 현재 동원을 비롯한 2~3곳만 맥을 잇고 있다. 그는 마도로스 출신답게 바다에서 얻은 경영 지혜를 설파했다. “항상 같은 방향으로 돛을 올리는 사공은 결코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바람에 따라 그때그때 돛의 방향을 바꿔야 순풍을 따라갈 수 있죠. 본업을 버리는 자는 망하고 본업만 하는 자도 망한다는 일본 격언도 있잖아요. 또 평균 풍속보다 순간 풍속은 훨씬 빠릅니다. 1t을 견뎌야 한다면 5t은 견딜 수 있게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회사 역시 미리 위기를 준비해야지, 위기가 왔을 때는 이미 늦습니다.”

글=최은경 포브스코리아 기자
사진=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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