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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예술이 끓다, 사상이 터지다 … '20세기 전위도시' 비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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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00년 전후의 비엔나는 새로운 사상과 예술의 실험실 같았다. 특히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카페 600여 개가 성행했다. 1 ’국민카페’라 불린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의 풍경을 그린 라인홀트 푈켈의 그림(1896·비엔나 박물관). 2 비엔나를 대표하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 시립박물관 디자인 스케치(1922). 3 구스타프 파이트가 그린 ‘비엔나 조감도’(1873·비엔나 박물관). 4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 5 비엔나 공방에서 제작한 패션 우편엽서(채색석판화). 6 비엔나 공방에서 제작한 연하장. 회화와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비엔나 스타일을 발전시킨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작품. 7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사진 예경]

비엔나 1900년: 삶과
예술 그리고 문화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태
터 지음, 박수철 옮김
예경, 463쪽, 4만5000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우리가 그 도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존의 문화사가 세계의 수도였던 파리를 중심으로 쓰였기 때문일 게다. 1900년을 전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작가이자 출판인인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태터가 책임저자로 참여한 『비엔나 1900년』은 이 부당하게 망각된 도시의 영광스러운 기억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생생하게 우리 눈앞에 다시 펼쳐 보여준다.

 미술의 문외한이더라도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름을 들어 알 것이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목록에 에곤 쉴레·페르디난트 호들러·오스카 코코슈카,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작업을 선취한 비엔나 공방을 첨가할 것이다.

 1900년 전후의 비엔나의 미술계에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 누보’ 양식에 대한 독일식 명칭. 젊음을 뜻하는 미술잡지 ‘유겐트’에서 유래)과 상징주의, 그 뒤를 잇는 표현주의 등 다양한 예술적 실험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의 유겐트슈틸은 파리의 아르누보에, 비엔나의 상징주의는 뭉크로 대표되는 북구의 상징주의에, 비엔나의 표현주의는 독일의 표현주의에 그 존재가 가려진 느낌이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조명하는 전성기의 비엔나는 전통과 혁신이 모순적 공존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모더니즘 운동이 정점에 달한 1920년대에 비엔나의 절충적(?) 양식은 벌써 시대착오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비엔나 문화는 ‘세기말’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고, 이 말은 다시 데카당스·염세주의·탐미주의 등 다양한 세계감정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세기말’은 한 시대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불안한 공포와 뭔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어지럽게 뒤섞인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비엔나 1900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비엔나를 배경으로 벌어진 이 전통과 현대의 길항작용이다.

 가령 바우하우스 개념을 예고한 비엔나 공방의 예를 들어 보자. 유겐트슈틸을 뛰어넘는 새로운 현대적 디자인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비엔나 공방의 디자인은 현대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산업시대를 맞아 쓸모 없고 구시대적으로 전락한 수공업 생산에 예술적 품위를 선사하는 빌미”가 됐다는 점에서는 비엔나 공방은 여전히 전통적이다. 당시 비엔나는 전통의 태내에서 현대를 낳는 산고를 겪고 있었다.

 이는 비엔나를 대표하는 오토 바그너의 건축에서도 드러난다. 그에게서 우리는 “현대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되는 수많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그가 지은 노이슈티프트가세의 아파트에서는 장식물이 거의 사라지고 단조로운 창문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건물을 어느 방향으로든 확장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통적 견해에 얽매여 건물에서 위계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토넷 형제가 디자인한 ‘의자 등받이’(1850). [사진 예경]

 비엔나의 문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을 장식한 것은 역시 음악이리라. 당시 비엔나는 브람스·브루크너 같은 후기낭만주의 작곡가들과 나란히 구스타프 말러와 아널드 쇤베르크의 ‘신음악’ 운동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말러의 음악은 비엔나의 분위기를 대표했으나, 비엔나는 그를 위해 그 흔한 동상 하나 세워주지 않았다. 12음 기법으로 현대음악의 초석을 놓은 쇤베르크는 물론 이해받지도 못했다.

 “‘비엔나의 문학’ 하면 모두가 카페의 커다란 탁자에 둘러앉은 모습을 떠올릴” 정도로 문학 활동은 카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00년대에는 카페 첸트랄, 1918년 이후에는 카페 헤렌호프가 문학적 교류의 중심지가 됐다. 카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그리하여 “정치적, 성적 측면에서 혁명적인 사고를 가진 존재들이 새로 문을 연 카페에 앉기 시작했고, 미라들은 옛 카페에 머물렀다.”

 당시의 비엔나는 수많은 철학적 사유의 온상이기도 했다. 마흐의 경험비판론, 브렌타노와 훗설의 현상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비엔나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현상학은 근대철학의 태내에 머물면서 현대철학의 요소를 담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역시 이 시기에는 실증주의라는 근대적 프레임 안에서 현대적 언어비판을 수행했다.

 비엔나의 문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리라. 그의 『꿈의 해석』은 공교롭게도 1900년에 출판됐다. “비엔나의 이 기이한 학문”은 인간을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은 전통적 인간관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정신분석학은 ‘붉은 비엔나’ 시절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심리요법의 주요 형태로 자리 잡으나, 비엔나 정신분석학회는 1938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산된다.

 길항작용의 사전적 정의는 상반되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여 그 효과를 서로 상쇄시키는 작용이다. 1900년의 비엔나를 이 말처럼 정확히 설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전통과 현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유대인의 활동과 반유대주의, 이 모든 모순적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상쇄하며 만들어내는 모종의 항상성으로 유지되던 상태. 그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비엔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엄청난 문화적 활력에도 문화사에서 비엔나가 기억되지 못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성기 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비엔나의 문화가 ‘절충적’인 것으로 비칠지 모르나, 당시 비엔나는 그 모든 진통 속에서 ‘현대’가 탄생하는 현장이었다. 『비엔나 1900년』은 그 위대한 현장의 인상주의적 스케치를 제공해 준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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