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과거사 국가 배상금 연 1340억] 보도연맹 30만 명, 긴급조치 1140명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위자료 기준 명확히 제시한 판결 없어

구체적인 과거사 관련 국가 배상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점도 발견된다. 우선 위자료를 정하는 기준이 모호하다. 본지가 과거사 배상 관련 10여 건의 판결문을 분석해본 결과 위자료 산정 기준을 똑 부러지게 제시한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국가가 저지른 불법의 중대성,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 복역기간,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는 설명으로 끝냈다. ‘다른 사건과의 형평성’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사건 종류별로 경향성은 보인다. 불법행위 발생일이 현재시점에 가까울수록,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사형이나 고문을 당했을 경우 금액이 컸다. 법원은 보도연맹이나 여주 양민학살 사건에서 피해자 본인에게 8000만원, 배우자에게 4000만원을 주도록 판결했다. 반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숨진 사형수들에게는 10억원, 1980년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집행된 김모씨의 경우 본인 위자료만 25억원이 책정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10개월 남짓 복역한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위자료는 본인분만 5억5000만원(가족 합계 13억4000만원)이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과다 위자료 논란에 “일단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 10~20여 건을 펴 놓고 참조한다. 이후 개별적인 사정을 고려해 금액을 정하는데 형량이 높고 구속기간이 길수록, 고문 같은 가혹행위가 클수록 위자료가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이미 보상금을 받은 뒤 손해배상을 청구한 경우 재판부마다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는 지난해 1월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민주화보상금을 미리 탄 7명의 본인 위자료 청구를 기각하고 가족들에 대한 위자료 요구만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달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불이익을 보는 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법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며 위자료 지급을 결정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형평성 논란 … 동의대 순직 경찰은 1억

1975년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중앙포토]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5년간 옥살이를 했던 이모(64)씨는 2008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오자 형사보상을 신청해 2억7000여만원을 탔다. 2011년에는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5억7000만원(가족 포함 10억여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어 재산상 손해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다시 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는 지난해 8월 “5억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사건 당시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었으니 국가의 불법행위가 없었다면 1981년 교사로 임용돼 정년인 62세까지 근무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불법행위에 따른 재산상 손해(적극적 손해), 그동안 얻지 못한 수입(소극적 손해), 정신적 피해(위자료)를 모두 배상해야 한다는 ‘손해 3분설’을 충분히 활용한 사례다. 정부법무공단 서규영 변호사는 “손해 3분설이 법조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이지만 이미 위자료 산정 때 이 부분이 반영된 측면도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1974년 전남대 국문과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민주통합당 이학영 의원도 당시 교직과목을 이수했다는 이유로 위자료 2억5000만원과 함께 교사수입 상실분 10억6000만원을 배상받았다. 법원이 돈 벌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판단한 기간에는 이 의원이 79년 사회주의 혁명자금을 마련하겠다며 최원석 당시 동아건설 회장 집을 턴 혐의로 수감된 3년6개월과, 국회의원 등 다른 직업에 종사했던 기간 등도 포함됐다.

 다른 국가유공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경찰청은 1989년 동의대 사건에 투입됐다 숨진 경찰과 전경 7명의 유족에게 사건 발생 23년 만에 1억1400만~1억2700만원을 지급했다. 그나마 사고 당시 유족들에게는 390만~1900만원 정도의 위로금만 지급됐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유족들은 3100만~8100만원의 정부보상금과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4억원씩을 받았다.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희생된 장병 46명은 국가로부터 2억~3억5800만원의 일시금을 받은 뒤 국민들이 모금한 돈 5억원을 추가로 받았다. 최근까지 서울고검에서 국가 관련 배상소송을 지휘했던 강신엽 부장검사는 “독립유공자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사람에 비해 소송을 통해 훨씬 많은 돈을 받는 것이 상식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한된 인원·시간 … 조사 신빙성 의문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말 활동을 종료했다. [중앙포토]

‘과거사위 조사 결과가 법정에서 다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했는가’. 이 점도 과거사 관련 배상 소송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제다. 법원은 불법행위가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를 판단할 때 과거사위 결정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대부분의 관련 사건 판결문에는 “과거사위(또는 진실화해위) 기록상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것이 분명하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정부 측에서는 재판 때마다 고문 후유증 등에 대해 의학적 감정을 포함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과거사위가 제한된 인원과 시간으로 그 많은 원고들의 피해 상황을 일일이 다 점검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법무부는 “대부분의 사건에서 희생자 가족 등 특수관계자의 진술만 듣고 판단했고 반대 증거를 살펴볼 제도적 장치조차 없었다”며 “진상규명 신청이 각하되거나 규명 불능으로 결정된 예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오래된 사건을 조사하는 데 따르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지적도 많다. 특히 북한 쪽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이유로 범죄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2010년 과거사위 상임위원을 지낸 정승윤 부산대 로스쿨 교수는 “법률 지식이 미흡한 조사관 한 명이 실체 조사 없이 오래된 수사·재판 기록만 보고 조작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모든 조사가 완벽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전했다.

“국회서 과거사 배상 기준 입법화해야”

국가배상 소송은 앞으로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린 긴급조치 1·2·9호 위반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나면 곧바로 손배 소송을 제기할 전망이다. 긴급조치 4호 역시 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된 사람은 모두 1140명이나 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이달 초 ‘긴급조치 재심 및 국가배상 등에 관한 안내’ 설명회를 개최했다. 민변 긴급조치 변호단 조영선 변호사는 “일단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확정받고 이를 통해 국가 배상을 청구할 텐데 배상 소송은 형사 판결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제기해 시간을 단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도 이미 소송이 제기되기 시작해 하급심 승소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원래 1949년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였으나 6·25전쟁 발발 후 군과 경찰에 의해 수많은 연맹 회원들이 살해됐다. 법무부는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수가 전국적으로 5만~30만 명 정도라고 추산하고 있다. 최근 희생자 가족당 1억5000만원가량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받은 울산 보도연맹 사례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최소 7조5000억원이 들어갈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일부 변호사들이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 배상을 위한 기획소송을 내기 위해 9000명을 목표로 원고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이처럼 소송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과거사 정리법이 진상 규명만 규정하고 배상에 대한 후속조치에 미흡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은 진상규명 대상을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사실상 무한대로 늘려놨다. 따라서 진상규명에 따른 피해보상(배상) 규모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 수 있었다. 법은 ‘정부가 피해자의 피해와 명예회복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간 민주화운동보상법을 제정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이 없다. 손해배상 소송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

 이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실 규명에 따른 적절한 피해 배상 기준을 마련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동국대 김상겸 교수는 “배상액이 너무 많다는 논란이 있는 만큼 입법부가 나설 필요가 있다”며 “다만 입법 때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논의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관련기사]
▶"이러다 임진왜란 피해까지…" 예산으로 갚는 과거사
▶"10달 복역에 5억 많아" "그 돈 받고 고문당하겠나"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