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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상기술자 … 놀이가 곧 일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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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평소라면 캐주얼 복장으로 뒹굴었을 테다. 그러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 홍유리 수석 디자이너(왼쪽)와 조병휘 소장의 서울 성북동 사무실 ‘빅’은 온갖 장비로 채워진 작은 놀이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푹 빠지게 할 쇼가 필요하다”고 한 말이 씨앗이 됐다. 이탈리아에서 십 수년째 살고 있던 건축가는 자신의 말을 책임지느라 영구 귀국했다. 디자이너는 건축가의 쇼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바로 내 일’이라 싶어 다니던 조명회사를 그만뒀다. 둘은 지난해 전남 여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사업단에 소속돼 물·불·빛·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멀티미디어 쇼 ‘빅오’를 만들었다. 전세계 전문가들과 함께 23분의 쇼를 2년여에 걸쳐 완성했다.

 오랜 공을 들인 결과는 ‘대박’이었다. 매회 평균 3만 명이 여수 밤바다를 마주한 관람석을 빼곡히 채웠다. 사람들은 쇼에 빠졌고,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빠졌다.

 그들의 사기가 올랐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즐거운 공간을 만들자”라며 의기투합했고, 올 초 디자인그룹이자 건축사무소인 ‘빅(BIG)’을 차렸다. ‘빅’의 조병휘(37) 소장과 홍유리(33) 수석 디자이너다. 쇼와 놀이, 이야기가 어우러진 공간을 만드는 게 목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나 디즈니랜드 같은.

 서울 성북동 사무실에 들어서니 북악산을 타고 올라가는 서울 성곽이 보인다. 놀고 즐기는 쇼를 만든다 해서 시끌벅적한 곳에 있겠거니 했는데 예상 밖으로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사무실 안에서 전동 ‘씽씽이’를 타보라고, ‘소맥’(소주·맥주 폭탄주) 한 잔 하러 가자고 낮술을 권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벽면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칠판에 ‘IMAGENEER’(이매지니어·상상기술자)가 쓰여 있다.

 “디즈니 그룹에서 사용하는 직책인데, 월트 디즈니가 만든 말이에요. 상상력과 기술을 결합시켜 ‘동화 왕국’을 실제로 만드는 사람들이죠. 빅은 이야기를 시각·촉각 등을 통해 즐길 수 있게 만드는 회사고, 우리는 ‘상상기술자’입니다.”(조병휘)

 조 소장은 이탈리아 베니스 건축대학을 나와 아틀리에를 운영하던 중 2010년 여수세계박람회 사업단에 합류했다. 몇 달 간 마스터플랜(기본 계획) 도면을 그리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다 앞서 말한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전세계에서 잘나간다는 ‘상상기술자’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이화여대 산업디자인과와 연세대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홍 디자이너는 “조명회사에서 빛을 다루다 보니 빛·영상으로 공간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에 관심이 생겼다. 무작정 조 소장을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빅오쇼는 47m 높이에 설치된 원형 조형물(지름 33m)을 주축으로 해상 분수·레이저 등이 결합돼 선보인 특수효과 쇼다. 뻥 뚫린 원형 조형물 안에 물을 쏟아내려 이를 워터스크린으로 활용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스크린으로 기록된 서울 CGV영등포 스타리움 것보다 1.5배 크다.

 빅오쇼를 만들기 위해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기술력을 총동원했다. 조 소장과 홍 디자이너는 이들을 총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장관리를 위해 직접 배운 기술도 많다. 바다 속에 설치된 분수와 레이저 유지·관리를 위해 두 사람은 스쿠버 다이빙. 보트 운전 자격증도 땄다. 시설물에 자꾸 들러붙는 따개비·홍합을 떼기 위해서다. 조 소장은 “건축은 디자인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유지·관리하는 것을 아우르는 작업이고, 이를 매니지먼트 하는 것도 건축가의 일”이라고 말했다.

 빅오쇼는 엔터테인먼트 분야 세계적 행사인 ‘테아 어워드(THEA Awards)’에서 2012년 올해의 쇼로 선정됐다. ‘멀티미디어 쇼에 새로운 장르를 추가한 쇼’라는 평가를 받았다. 홍 디자이너는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상을 받아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빅은 현재 경남 남해군에 문을 열 이순신 순국 공원의 전시연출과 쇼를 맡아 하고 있다. 공원은 내년 말 완공된다. 순국의 메시지를 화려한 영상·빛으로 전달하고,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 놓을 작정이다. 그런데 쇼라고 하니 대형공원 같은 데서 보는 이벤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 소장은 “공간에 쇼와 이야기가 어우러지면 일상의 공간이라도 180도 달라진다”고 했다. 그 예로 미국 올란도 ‘피바디(peabody)’ 호텔을 꼽는다. 호텔의 테마가 오리인데, 오리가 정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호텔 로비로 들어와 분수에 빠져 논다. 단순한 이벤트 같지만 건축단계부터 철저히 계획된 퍼포먼스다.

 “‘빅’이 하고 싶은 것도 이런 겁니다. 피바디 호텔처럼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오리조련사와 분수 기술자들과 함께 작업하는 거죠. 건축가와 디자이너라고 해서 멋있고 압도적인 것만 해야 하나요. 빅은 즐거운 공간을 만들고 싶고, 이제 출발했습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빅’ 창업 비용은 …

지난해 여수세계박람회의 명품이었던 ‘빅오쇼’.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회사이다 보니,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곳에 사무실을 얻길 원했다. 고르고 골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한적한 서울 성북동에 보금자리를 텄다. 미팅을 위해 광화문·종로에 나갈 일이 생기면 북악스카이웨이를 탄다. 그 순간, 생각을 정리하고 정화시키는 느낌이 든다.

 무형의 기술력이 가장 큰 자본이지만, 사무실 빌리는 데 2000만원의 보증금이 필요했다. 약 198㎡(60평)의 사무실의 월 임대료는 200만원이다. 새로 뽑은 직원 둘을 포함해 총 4명이 쓰기엔 넓은 듯 하지만, 사무실의 진짜 주인은 온갖 장비다. 음악 사운드 시스템, 전기 장비, 케이블과 각종 영상장비 등이다. 심지어 클럽 DJ용 턴테이블도 있다. 공간의 쇼를 만드는 회사다 보니 시뮬레이션 할 때 필요한 장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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