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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닥치면 해결해 보는 거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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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28면

작가에게 글이 써지지 않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써야 하는데, 작가니까 그게 살아있음을 알리는 유일한 길인데, 안 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진실한 문장만 쓰면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야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한 말인데, 1952년 이맘때 그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4> 『노인과 바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Ernest Hemingway) 젊은 시절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특유의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 속에 풍부한 상징과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냈다.

두 해 전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10년 만에 『강 건너 숲 속으로』를 발표했으나 평론가로부터는 혹평을 받았고 독자들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다. 남성적인 외모와 달리 소심한 성격이었던 헤밍웨이는 끝 모를 고독 속에서 술과 낚시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3년 전 짤막하게 써두었던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냈을 것이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를 주인공으로 한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늙은이로 벌써 84일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첫 문장이 말해주듯 사람들은 노인에게 운이 다했다고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다른 어부들이 가지 않는 더 먼 바다까지 나간 노인은 마침내 자기가 탄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낚아 이틀 밤낮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뱃전에 묶고 돌아간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공격해오고 노인은 고독하게 싸우지만 새벽녘 항구로 들어온 그의 배에는 머리와 앙상한 뼈만 남은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8주 만에 완성해 출판사로 넘겼는데, 당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라이프’가 그해 9월 호에 전재(全載)했다. 이 잡지는 무려 531만8650부나 팔려나갔고, 곧이어 출간된 단행본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대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노인과 바다』의 매력은 무엇보다 거친 자연과 운명을 바라보는 인간적인 시선이다. 노인은 바다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라마르(la mar)라는 여성형으로 생각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젊은 어부들은 바다를 엘마르(el mar)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곤 한다. 바다를 경쟁 상대나 적수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에게 바다는 항상 여성이었다. 큰 혜택을 베풀 수도 있고 베풀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녀가 광포하거나 마음씨 나쁜 일을 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고는 꾸준히 노를 저어갔다.

비록 84일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그는 낚싯줄을 정확하게 드리울 줄 안다. “어쩌면 오늘은 걸릴지도 모르지. 매일매일이 새 날이니까. 운을 타는 쪽이 더 낫기는 하지만 난 정확하게 해나가겠어. 그럼 운이 왔을 때 운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까.”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날 밤 노인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에게 연민을 느낀다. 예전에 다랑어 한 쌍 중에서 암컷 한 마리를 잡았을 때를 떠올린다. 물고기들은 항상 암컷으로 하여금 먹이를 먼저 먹게 하는 습성이 있다. 낚싯바늘을 삼킨 암컷은 공포에 질려 마구 날뛰다 곧 지쳐버렸지만 수컷은 줄곧 암컷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암컷을 배 위로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뱃전을 맴돌았다. 그러다 갑자기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는데, 암컷이 어디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가슴지느러미가 연한 보랏빛이었던 그 아름다운 수컷은 마지막까지 보트를 쫓아왔다. “그것이 내가 겪은 제일 슬픈 경험이었지. 우리는 용서를 빈 다음 곧바로 암컷을 죽여버렸어.”

첫 번째 상어가 다가왔을 때 노인은 결의에 차 있었다. 희망은 없었으나 피로 범벅이 된 두 손으로 작살을 잡고서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그렇게 처음 상어는 물리쳤지만 청새치는 40파운드나 뜯겨나갔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금세 다시 몰려올 것이었다. 노인은 생각한다. “그건 지속되기엔 너무 좋은 일이었어. 차라리 모두 꿈이었다면 좋겠는데. 저 물고기를 낚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냥 혼자 침대 위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었더라면.”

바다를 닮은 산티아고 노인은 패배를 각오하면서도 담담하게 다시금 도전을 결의한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는 거야.” 상어가 또 올 것이고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작살마저도 없다. 노인은 계속 생각한다. “일이 닥치면 해결해보는 거야.” 어차피 그게 인생이고 운명이다. 힘겨운 투쟁 끝에 무언가를 얻었다 해도 그 즐거움은 너무나 짧게 끝나고 곧 비애와 아픔이 찾아올 테니까.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대어를 낚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며 폭음을 일삼았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비행기 사고로 부상을 입는 바람에 노벨상 수상식장에도 가지 못했는데, 스톡홀름으로 보낸 수락연설에 이렇게 적었다. “글쓰기는 기껏 잘해야 고독한 삶입니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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