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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캐나다 학생도 탈북인 돕는데 한국은 무관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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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11면

지난달 26일 박석길 대표가 중앙SUNDAY 편집국을 찾아 링크가 만든 탈북인 다큐멘터리 DVD를 들어 보이고 있다. 조용철 기자

1998년, 영국에 살던 14세 소년은 한국을 처음 찾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할머니의 유해를 친척들이 있는 한국으로 모시고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할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영국에서 한국어-영어 통·번역가로 일하는 아버지는 소년에게 한국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BBC뉴스에서 ‘코리아’만 나오면 아들에게 “빨리 와서 보라”고 채근했다.

파워 차세대 <26> 북한주민 지원 NGO ‘링크’ 한국사무소 박석길 대표

 소년은 처음 온 한국에서 북한이란 존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버스를 탈 때마다 눈에 띄는 빨간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이게 뭐냐”는 아들의 물음에 아버지는 “북한 스파이를 신고하라는 내용”이라고 설명해줬다.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실감했다.

2011년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인권 콘퍼런스에서 박 대표가 탈북인 실태를 발표하고 있다.

 15년 뒤인 2013년. 소년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대학을 졸업한 뒤 국제 비정부단체 ‘링크(LiNK·LIBERTY IN NORTH KOREA)’의 정보전략부장이자 한국사무소 대표로 일한다. 링크는 북한 주민과 탈북인(링크는 ‘탈북자’ 대신 ‘탈북인’이란 단어를 선호한다)을 위해 일하는 단체다. 미국 한인 학생들이 2004년 워싱턴DC에서 만들고 2008년엔 LA로 본부를 옮겼다. 지금까지 중국 등 제3국에 숨어있던 탈북인 141명을 한국·미국 등으로 탈출시켰다. 탈북인 정착을 돕기 위해 2012년 5월엔 한국사무소를 발족했다. 상근 활동가 3명으로 구성된 한국사무소를 이끌면서 링크 전체의 전략을 짜는 게 바로 재영동포 박석길(30)씨의 일이다.

조부모가 북한 출신 … 친척도 北에
“전 세계가 북핵과 김정은보다 2400만 북한 주민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탈북인들의 탈출과 정착을 지원하고, 북한 내부 변화를 촉진하는 게 우리의 미션입니다.”

 최근 만난 박씨의 한국말엔 막힘이 없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 영어로 e메일을 보냈을 때는 유려한 한글로 답장을 보내왔다. 어머니가 영국인이다 보니 외모는 이국적이고 가끔 영어 단어를 섞어 쓰지만 말투는 천생 한국인이다. 한국에 친척들이 많은 데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1년간 연세대 어학당을 다닌 덕분이다.

 영국 워릭대(University of Warwick)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2007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행정안전부의 지방정부연수원 국제협력교육과에서 일하며 개도국 공무원에게 한국의 경제·문화를 알렸다. 이후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관계학·국제사 석사를 받고, 뉴욕 유엔본부 인턴십을 거쳐 비영리 외교컨설팅 단체 ‘인디펜던트 디플로맷(Independent Diplomat)’에서 일했다. 어릴 적 꿈꾸던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박씨는 북한에 대한 관심을 떨치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북한 출신이세요. 북한에 작은할아버지, 작은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이름도 모르는 친척들이 북한에서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죠. 그러다 유엔 인턴십을 하느라 뉴욕에 있을 때 탈북인들을 만나게 됐고, 북한 주민을 위한 일을 하겠다는 열정을 갖게 됐어요.”

 그는 링크를 통해 수많은 탈북인들을 만났다. 원래 탈북인들에게 관심을 갖던 차에 금융전문가 출신으로 탈북인들을 돕는 마이크 김(책 북한 탈출의 저자이자 탈북 구호단체 ‘크로싱 보더’ 설립자)의 강연을 들으러 간 게 링크에 참여한 계기였다. 마이크 김은 박씨에게 링크에서 활동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출신인 신동혁씨를 만났고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2010년엔 신씨 등 탈북인 3명과 LA에 같이 살기도 했다. 북한 주민과 탈북인을 같은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게 된 출발점이었다.

 “신동혁 형은 제 친형하고 생년·생일이 똑같아요. 그런데 동혁 형은 13, 14세에 어머니가 사형당하는 걸 봤어요. 또 아버지가 굶어 죽는 걸 봤다는 탈북인도 만났어요. 제가 살아온 세계와는 너무 다른 세상인 거예요. 그런데 동질감이 느껴져요. 제가 혼혈인이어서 그런지 한국 사람도 영국 사람도 아닌, 아웃사이더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탈북인들도 한국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아웃사이더 같다고 해요. 그래서 더 쉽게 친해진 것 같아요.”

 그에겐 절친한 ‘탈북인 형’이 5명 넘게 생겼다. 그는 외교관의 꿈을 접고 북한 주민을 돕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제 커리어(경력)를 걱정하시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유엔 직원으로 일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잖아요. 그런데 북한에 대해선 할 수 있는 공간과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버지도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탈북인 한 명 탈출시키는 데 2500달러 들어
2010년 링크의 상근 활동가가 되면서 그의 일은 많아졌다. 우선 상근 활동가 16명(LA·동남아 등 포함)과 기부자 800여 명, 단체 관계자 등에게 북한 상황을 알린다. 미국,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노르웨이, 싱가포르, 스웨덴, 호주에 사는 대학생들이 주된 기부자다. 이들은 월 10달러씩 돈을 내는데 그중엔 월스트리트 헤지펀드에서 일하는 이도 있다. 미국·캐나다·일본의 185개 대학에 만들어진 링크의 소모임에서도 티셔츠나 직접 구운 과자를 팔고 음악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한다.

 기부금은 주로 중국에 은신해 있는 탈북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쓰인다. 1명이 탈출하는 데 드는 돈은 교통비 등을 합쳐 2500달러(약 282만원)쯤 된다. 경유지인 동남아 국가에 은신처를 제공하고 미국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이에겐 영어 교육과 직업 훈련을 해 준다.

 박씨는 북핵과 김정은 체제 등 정치적 이슈에 집중된 국제사회의 관심을 북한 주민으로 돌려 보자는 ‘시프트(SHIFT) 운동’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링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처음 만든 ‘북한 주민의 위기(The People’s Crisis)’는 2012년 미국·캐나다에서만 771회나 상영됐다. 4만8930명이 참석해 12만9630달러(1억2074만원)가 모금됐다. 올해 만든 ‘탈북인 대니(Danny from North Korea)’도 각국에서 상영 중이다.

 박씨는 올 1월엔 런던정경대와 워릭대, 옥스퍼드대에서 북한 상황에 대해 강연했다. 추운 날씨에도 매번 70~80명씩 왔다고 한다. BBC월드서비스에 한국어 방송을 추가하는 방안도 영국의 데이비드 앨턴 상원의원과 함께 추진 중이다. 한국어 방송이 많아질수록 북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정보 유입을 통해 북한 주민의 잠든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링크는 ‘노마드(nomad·유목민)’ 운동도 펼친다. 회원들이 버스를 타고 수개월 동안 유목민처럼 미국 전역을 돌며 북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작년에 미국 50개 주 중 두세 곳을 빼고 거의 모든 지방을 돌았어요. 조그만 마을에 사는 미국인들이 ‘(북한 주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물을 땐 큰 보람을 느꼈어요.”

 이런 활동이 알려지면서 박씨는 최근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 포럼)이 젊은 리더들로 만든 ‘글로벌 셰이퍼스’(Global Shapers Community) 서울 허브 2기로 뽑혔다. 이 모임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지역 허브를 두는데 서울 허브는 2012년 시작됐다. 박씨를 면접한 이는 ‘WEF 차세대 리더’로 선정됐던 윤송이 엔씨소프트 부사장이라고 한다. 박씨는 또 지식나눔 콘퍼런스로 유명한 ‘테드(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기획자인 크리스 앤더슨이 지난해 방한했을 때 주최 측 연락을 받아 강연을 했다.

북 내부 변화를 촉진하는 게 가장 좋아
이제 그의 목표는 한국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는 한국 학생들이 탈북인을 너무 모르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에 탈북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1000명인지 10만 명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2만5000명 정도 된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한국 학생들이 북한 주민에 무관심한 건 북한 이슈가 너무 정치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북한인권단체라 하면 바로 우파, 보수라고 하잖아요. 저희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죠. 북한 주민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예요. 그래서 북한인권단체란 표현을 꺼려요. ‘북한 인권’보다는 가급적 ‘북한 잠재력 발달’이라 표현하고요.”

 그는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100% 맞는 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부 압력이나 고립만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햇볕만으로도 북한의 외투를 벗길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몸 안에서 못 참을 정도로 열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외투를 벗게 될 거예요. 그래서 북한 내부의 변화를 촉진시키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꼭 북한이 붕괴돼야 하는 건 아니에요. 북한의 미래는 주민들이 선택해야지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변하긴 해야 합니다.”

 그는 요즘 북한에 다양한 정보를 유통시키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정보가 많을수록 북한 내에서 변화 움직임이 커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김일성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 북한 배급체제가 붕괴된 시대에 장마당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장마당 세대’에게도 기대를 건다.

 북한이 고조시키고 있는 핵전쟁 위협에 대해선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영국에 있는 그의 부모도 걱정할 법하다. “괜찮아요. 부모님도 한국 사람들처럼 북한을 잘 알아요. 북한이 말로 위협만 하는 거라고 보세요.”

 ‘동포 비자’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는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일할 작정이다. “북한 주민을 위해 평생 노력할 마음이 있어요. 북한이 개방되면 북한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대단한 잠재력을 실현할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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