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읽기] 귀로 보는 배리어프리 영화 … 안대를 벗고 말았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부산 영화의 전당 중극장, 2013. 4

“초록이(오리)가 긴 하수도 터널을 지나 쇠창살 사이로 빠져나와 비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글만 읽고 눈을 감아보세요.

 글은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감독 오성윤)’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오리들의 새 지도자 뽑기대회에 참가한 주인공 초록이가 비행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동영상을 보셨나요? 움직이는 그림이었나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었나요? 컬러였나요? 흑백이었나요?

 ‘장애인의 날’(20일 오늘입니다)을 앞두고 부산시 공무원 400여 명은 17일 부산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서 시·청각장애인용 ‘배리어프리 영화(Barrier-Free Film)’를 체험했습니다. ‘장벽(Barrier)으로부터 자유로운(Free) 영화(Film)’라는 뜻입니다. 시·청각장애인들에게 비주얼과 사운드는 장벽입니다. 배리어프리 영화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 장면이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라며 음성 해설로 영화를 보게 해줍니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는 화면 한편에 ‘슬픈 분위기의 음악 잠시’와 같이 장면 자막으로 영화를 듣게 해줍니다.

 이곳에서 상영된 ‘마당을 나온 암탉’은 지난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제작돼 상영된 배리어프리 영화입니다. 이날 공무원들의 단체 관람은 1급 시각장애인인 부산시의회 이경혜 의원이 제안해 이뤄졌습니다. 이 의원은 축사에서 “저는 40년간 보면서 살다가 13년간 시각장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라며 “제발 이 영화 보는 동안만이라도 답답하고 불편하시겠지만 안대를 하시고 영화를 귀로 봐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도 이날 사진 취재를 끝낸 뒤 검은 안대를 하고 배리어프리 영화를 체험했습니다(작은 사진). 참 답답하고 갑갑했습니다. 배경과 움직임을 설명하는 해설을 들으며 상상만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20여 분쯤 지났을까요. 상상하는 것과 장면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안대를 살짝 들었습니다. 장면은 상상하는 것,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주인공 ‘잎싹’(암탉)이는 눈부시게 예뻤고, 시골 마을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형형색색에 취해 안대를 벗은 채 한동안 영화를 봤습니다. 문득, 미안했습니다. 다시 안대를 했습니다.

 최숙희(42·여·부산시 영상문화산업과)씨는 영화가 끝난 뒤 “안대를 벗고 싶다는 욕구를 참느라 혼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덧붙여 “앞으로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할 거예요”라며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과 서비스를 더 많이 확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주말 많은 이들이 영화관을 찾겠지요. 영화 상영 도중 1분이라도 눈을 감아보는 건 어떨까요? 1분만이라도 귀를 가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사진=송봉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