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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계 맥가이버' 철망이든 유리든 못 만드는 것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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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직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인 국제갤러리는 가로·세로 10m, 높이 4m의 거대한 철망 옷을 입고 있다. 외관 컨설팅 회사 ‘프론트’의 작품으로 52만1000개의 링을 용접해 완성했다. 마이클 라는 “쇠링 소재를 처음 다뤄본 데다가 한국에서 처음 한 프로젝트라 뜻 깊다”고 말했다. [사진 국제갤러리]
마이클 라

2년 전 서울 삼청동 카페 골목 한 편에 조그만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평범한 듯 독특한 외관이 시선을 끌었다. 구멍 숭숭 뚫린 철망이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다. 빈 집에 놓인 가구에 먼지가 쌓이지 못하게 씌워놓은 천 같다고나 할까.

 이 건물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국제갤러리가 지은 갤러리 3관, ‘K3’다. 미국에서 한창 뜨고 있는 젊은 건축가 그룹 ‘쏘일(SO-IL)’의 작품이다. K3는 완공되자마자 미국 건축상인 AIA 뉴욕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듬해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는 건물의 디자인 컨셉트와 작업모델을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K3 작업모델 등은 프랭크 게리,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은 저명 건축가의 작품과 함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쏘일’이 K3를 완공하기까지 중요한 공(功)을 세운 회사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외관(파사드) 컨설팅 회사 ‘프론트’다. ‘프론트’는 건축가가 상상하는 건물 외관을 실제로 만드는 일을 한다.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분야다. 쉽게 말해 건축가가 건물 설계도를 들고 와 “이 건물을 유리로 짓고 싶다”고 한다면 그 다음은 프론트가 나선다. 찰흙 다루듯 유리로 모양을 내고, 구조체로써 건물이 안전하게끔 컨설팅한다. 최근 이화여대에서 열린 건축포럼에 참석한 프론트 마이클 라(46) 공동대표는 자칭 ‘건축계의 문제해결사’라고 표현했다.

국제갤러리·시애틀 도서관 건축 참여

일본 오사카에 있는 루이뷔통 스토어는 돌 ‘오닉스’와 유리를 붙여 만들었다. [사진 프론트]

‘K3’의 경우 건축가는 라를 찾아와 “건물에 철망을 씌우고 싶다”고 했다. 라는 “철망이 바람과 같은 압력에 찢어지지 않게 하면서 예산·디자인 등을 감안해 열쇠고리 같은 스테인리스 스틸 링(지름 30㎜, 두께 4㎜)을 만들어 이어 붙일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건물을 덮을 철망을 만들기 위해 52만1000개의 링을 용접했다. 작업은 중국에서 이뤄졌고, 총 6개월이 걸렸다.

 2004년 렌 쿨하스가 설계한 미국 시애틀 공립도서관도 그의 손을 거쳤다. 건축가는 거대한 도서관 전체를 유리로 만들고 싶어했다. 빛과 열로 인해 책이 손상될 우려가 컸다. 라는 유리 사이에 구멍 뚫린 철판, 자외선 차단 플라스틱 등을 넣은 4중 유리를 만들었다. 이 유리는 일반 건물의 이중 유리에 비해 빛·열 등을 5분의 1 수준으로 차단한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루이뷔통 스토어는 ‘오닉스’라는 돌로 만들었다. 건축가 쿠마 켄고는 이 육중한 돌이 유리처럼 투명해지길 원했다. 라는 3~4㎜ 두께로 돌을 자르고 뒷면에 유리를 붙여 문제를 해결했다. 노란빛으로 반짝이면서 투명한 돌 건물은 이렇게 탄생했다.

 프론트의 작업은 패션으로 따지면 ‘오트 쿠튀르(고급의상점)’다. 돈·시간이 많이 든다. 잘 쓰지 않는 재료로 복잡한 모양의 건물을 짓기 위해 유럽에서 유리를 제작해 중국에서 자르고 미국에서 시공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렇게 돈 많이 드는 건물을 누가 지을까 싶다.

이들의 작업을 두고 뉴욕타임스는 “현대건축에서 ‘독특한 외관’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건축주들은 건물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전 례없는 외관을 가진 건물을 짓길 원하고, 파사드 컨설팅 분야는 갈수록 주목 받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유럽에서 제작·시공 나눠하기도

라는 재미동포다. 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교 졸업 후 미 해군에 입대해 6년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이후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파사드 컨설팅 분야에 뛰어들었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에 들어선 애플 스토어 외관 컨설팅을 맡았다. 애플 스토어는 유리 건물로 유명하다. 벽·계단·기둥 모든 구조체가 유리다. 라는 ‘유리는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4겹의 유리를 투명하게 겹쳐 썼다. “애플 스토어 작업을 통해 유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봤고 점점 다른 건축 소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했다.

 그가 동료 셋과 함께 프론트를 설립한 지 올해로 10년째다. 직원은 28명으로 늘었고, 외관 컨설팅 분야에서 입지도 공고히 다졌다. 사실 이 분야는 유럽이 선도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회사의 단골 손님 명단에는 프랭크 게리·렘 쿨하스·장 누벨·렌조 피아노 등 저명한 건축가가 빼곡히 올려져 있다.

 “건축가들이 컨설팅을 의뢰하면 일단 무조건 ‘예스’라고 답하고 가능한 방법을 찾았던 것이 비결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문제를 풀었지만 아직도 난제가 많습니다. 건축가들은 한번 풀어놓은 답안을 다시 쓰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하니까요.”

 그의 명함에는 ‘마이클 라’ 대신 ‘라나민’이라는 한국 이름만 적혀 있다. “나이 들수록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곧 법적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꿀 겁니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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