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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강릉 사람들의 혈관엔 커피가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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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주문진항 앞 허름한 식당에서 시래기 나물과 칼칼한 강릉식 강된장 ‘빡작장’으로 밥 한 뚝배기 비벼 먹고, 숭늉 한 그릇 얻어먹으니 이 서울 사람은 더 바랄 게 없었다. 한데 강릉토박이 친구들은 “어서 커피 마시러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곤 허허벌판 좁은 길을 따라 생뚱맞은 곳으로 데려갔다. 볼 거라곤 없는 벌판 위엔 국내 초창기 4대 바리스타로 꼽히는 박이추씨의 카페 ‘보헤미안’이 있었다. 6000원짜리 된장 먹고, 5000원짜리 커피를 마셨다. 말이 필요 없다는 인도 아라비카 드립 커피. 강릉 사람이 말했다. “5000원짜리 밥 먹고 6000~7000원짜리 커피 마시는 게 강릉스타일”이라고.

 강릉의 커피 사랑은 격했다. 그 유명한 안목 카페거리만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횟집보다 카페가 많았다. 거의 모든 카페들은 자체 로스팅 간판을 내걸었다. 강릉에선 커피 잘 뽑는 기술은 자랑거리도 못 된다. 생두를 직접 볶고, 갈고, 뽑고, 마실 줄 아는 게 기본이다. 콩은 카페에서만 볶는 게 아니었다. 상인·공무원·주부 할 것 없이 시민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집 뜰에서 뚝배기에 냄비에 자기 방식대로 커피콩을 볶는다. 절에서 차 대신 커피를 볶는 스님들도 있단다. “부처님이 요즘 사셨다면 커피를 드셨을 것”이라며. 보통시민들이 로스터기를 자기 스타일대로 만들어 쓰고, 콩 볶는 방법부터 가르치는 커피 아카데미는 셀 수 없을 정도다.

 박이추씨 등 강호의 고수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강릉의 ‘커피무림’엔 외지에선 힘깨나 쓰는 별다방·콩다방도 명함을 못 내민다. 무림의 고수와 협사들이 자신만의 비기(秘技)를 연마하면서 외지인들부터 이곳을 무림이 아닌 ‘성지(聖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순례객들이 관광차로 승용차로 몰려든다. 퇴락하던 남문동 구도심도 카페 몇 개와 소극장이 문을 열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시 관계자는 “커피가 강릉의 경제를 살리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릉사람에게 물었다. 보수적인 예향 강릉에 웬 외래문물 커피냐고. 그가 말했다. “원산지는 원두를 생산하고, 강릉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강릉 커피를 만들었다. 커피는 빡작장만큼이나 토속 생활문화다.” 강릉 사람들에게 다양한 원산지에서 온 원두는 외국 문물이 아니라 강릉의 커피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소재다. 하긴 지구촌 시대에 네 것 내 것 따지는 게 더 촌스럽다. 원적이 어디든 먼저 내 상품과 내 문화로 만들면 그게 내 것인 게 글로벌 시대 경쟁력인 것을. 이렇게 강릉의 개방적이고 즐길 줄 아는 시민들은 커피를 자신들의 자산으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신명만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창의적인 새 문화를 만든다는 게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양선희 논설위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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