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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한반도 대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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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금빛 관악기의 화려한 팡파르에 이어 무거운 저음의 현악기가 우울한 고뇌를 토해낸다. 이들 갈등하는 두 악기군(群)은 서로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총보(總譜) 속에서 하나의 피날레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중이다.

 음악은 수많은 음들의 수직적 결합과 수평적 연결로 이뤄진다. 수직적 결합은 화성(和聲)을, 수평적 연결은 대위법적(對位法的) 선율을 가리킨다. 각기 다른 멜로디의 콘트라스트가 동시에 어우러지며 조화의 하모니를 창조해가는 대위법은 갈등 속에서 화합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관계의 현실과 이상을 그대로 품고 있다.

 오늘의 한반도는 총체적 콘트라스트의 전시장이다. 지구상에 남북한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곳은 달리 없다. 북에서는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만큼 굶주리는데, 남에서는 실컷 먹어 부풀어 오른 뱃살을 도로 빼내느라 엄청난 돈을 퍼붓는다. 이 슬픈 대조, 부끄러운 간극(間隙)을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북한 청년들의 군복무 기간은 장장 7년인데, 남쪽에서는 1년9개월도 너무 길다고 더 줄이겠단다. 현역병 입대의 신장 기준이 북한은 1m42㎝, 남한은 1m58㎝다. 이 16㎝의 차이 속에 한반도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태양절이라는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민들은 ‘민족의 태양’ 동상 앞에 열을 맞춰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초대 대통령의 동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남에서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5년마다 정권이 바뀌고, 북에서는 인민의 결사옹위 속에 신성가족(神聖家族) 3대가 65년이 넘도록 절대 권력을 이어간다. 어느 한쪽은 민주주의의 이름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북의 방송매체가 일제히 ‘서울 불바다’의 위협을 쏟아내도 남쪽의 텔레비전들은 걸쭉한 수다와 선정적 오락 프로그램으로 온종일 흥청거린다. 북에서는 연일 ‘최후 결전’을 부르짖는 군중대회가 열리는데, 남에서는 거리마다 유흥과 향락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태평성대의 봄꽃놀이가 한창이다. 안보 자신감인가, 안보 불감증인가.

 핵무기를 거머쥔 북한이 ‘한라산에 인민공화국 깃발을 휘날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판에, 남에서는 국고보조금을 받는 정당이 연례적 방어훈련을 ‘평양 점령 훈련’이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한라산보다 평양의 안전이 더 걱정된다는 뜻인지, 속내가 궁금하다.

 북에서는 서너 사람만 은밀히 모여 웅성거려도 보안원의 눈에 불꽃이 튄다는데, 남에서는 서울 한복판 대한문 앞의 불법 농성 천막 하나에도 공권력이 쩔쩔매며 갈팡질팡한다. 북에는 병영(兵營) 같은 폐쇄사회가, 남에는 자유분방한 개방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목선(木船)에 오른 29세의 ‘최고 존엄’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환송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과 주민들이 차가운 겨울 바다에 선뜻 뛰어들어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판타지가 아니다. 눈물겨운 충성(?)의 현장이다. 인류학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반만년을 같은 땅에서 같은 말, 같은 글을 쓰며 함께 살아온 남북의 한 핏줄이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 있는지를.

 그렇지만 남과 북이 늘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습한 조화가 어른거리는 백년 시리즈도 있다. 북쪽의 ‘백년 숙적(宿敵)’ 구호는 미국을 민족의 철천지원수로 몰아가고, 남쪽의 ‘백년 전쟁’ 영상물은 건국 대통령을 미국의 꼭두각시이자 하와이언 갱스터로 몰아간다. 북의 막말 행진에 장단 맞추는 종북(從北)의 추임새가 남쪽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새나온다.

 단일 선율의 제창(齊唱)이 따르지 못하는 대위법의 오묘한 세계는 콘트라스트의 다양성과 하모니의 통일성으로 구성된다. 엇갈림과 어울림, 갈등과 화합은 대위법의 두 기둥이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극렬한 대결, 끝 모를 갈등만 있을 뿐 화합의 하모니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북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온통 불협화(不協和)의 파열음뿐이다. ‘제2의 조선 전쟁’이라니, 6·25 남침까지 세습하려는가.

 절제된 불협화음은 음악에 긴장을 불어넣고 불안과 부조리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역설의 화성법이지만, 불협화의 과잉은 전체적인 하모니를 깨뜨려 음악의 통일성을 망쳐버린다. 줄곧 파열음만 뱉어내는 연주자를 무대에서 퇴출해야 하는 이유다. 불량 연주자의 교체만이 한반도의 무대에서 통일의 하모니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무대의 최종 책임은 지휘자에게 있다. 화성적 대위법에 충실한 지휘자라면 끝내 조화를 거부하는 사이코패스 연주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지휘대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 있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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