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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등 1조원 넘는 작품 화끈하게 기부한 회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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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세계적 화장품 기업 에스티로더의 레너드 로더 명예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입체파 작가들의 작품 78점을 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했다. 작품들의 시장 가치는 10억 달러 상당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지금까지 개인으로부터 기증받은 것 중에 최대 규모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
블로 피카소(1881~1973)의 1913년 작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 페르낭 레제(1881~1955)의 1914년 작 ‘담배 피우는 사람’, 피카소의 1914년 작 ‘압생트 잔’.

파블로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의 걸작 78점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하 메트미술관)에 기증됐다. 시장 가치로 10억 달러(약 1조1395억원)에 이른다. 조건 없는 기부의 주인공은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의 명예회장 레너드 로더(80·사진)다. 133년 뉴욕 메트미술관 역사에서 최대 규모 개인 기증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생존 수집가의 기증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9일(현지시간) 로더 명예회장의 미술품 기증이 이날 메트 이사회에서 승인됐다고 보도했다. 토머스 캠벨 메트미술관장은 “로더의 선물은 메트미술관을 혁신시킬 컬렉션이자 우리 시(뉴욕)에 엄청난 선물”이라며 환영 성명을 냈다. 그만큼 작품 면면이 화려하다. 피카소 33점을 필두로 조르주 브라크 17점, 후안 그리스 14점, 페르낭 레제 14점 등 78점이다. 로더 회장이 40년 가까이 수집해 온 애장품들이다.

 창업주인 어머니 에스티 로더(1908~2004)를 이어 세계 굴지의 화장품 기업을 경영했던 로더 회장은 미술애호가로도 유명하다. 뉴욕 휘트니미술관 이사회 의장을 오랫동안 맡으면서(지금은 명예회장) 2002년엔 다른 이사들과 함께 미 현대미술작품 87점, 총 2억 달러어치를 미술관에 기증했다.

다른 애호가들과 함께 2200만 달러를 쾌척해 메트미술관에 현대미술연구센터도 설립했다. 그의 동생 로널드 로더(69)도 미술 컬렉션의 큰손으로 통한다. 1976년 32세에 메트미술관의 최연소 기증자로 이름을 올렸다. 2001년엔 뉴욕 맨해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를 열었다.

 레너드 로더는 이날 기증을 발표하면서 “메트의 현대미술 컬렉션이 뉴욕 모던아트미술관(MOMA),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과 더불어 세계의 예술 수도로서 뉴욕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에야 처음으로 큐비스트 작품을 소장했을 정도로 현대미술 컬렉션이 약했던 메트미술관으로선 단비 같은 축복이다. 메트는 이미 로더 기증품을 넘겨받기 시작했으며 내년 가을께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기증으로 미술품 기증을 장려하는 미국의 세제 혜택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은 1917년부터 민간 및 공공미술관에 미술품을 기증할 경우 평가액만큼 감세 혜택을 주는 식으로 기부를 유도했다. 로더 회장도 이번 기증으로 최소 2억~3억 달러의 세금을 돌려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제도에 힘입어 미국 유명 미술관의 소장품 중 80% 정도가 기증품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은 논란 속에 미술품 양도세 과세가 올해부터 시행됐지만, 기증에 대한 제도적 혜택이 거의 없다. 세제 혜택 근거 규정이 복잡하고 시장가치 산정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한국미술산업발전협의회(실무위원장 정준모)는 “박물관·미술관에 예술품을 기부하면 이를 법정기부액으로 인정해 기부자에게 약 35% 정도의 소득세 감면 효과가 발생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자”는 보고서를 냈다. 협의회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이재경(건국대 로스쿨 교수) 변호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부자들의 미술품 기증은 대중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는 것으로, 이를 장려하기 위해 세제 혜택 등 제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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