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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움직이는 폭탄’ 사춘기 아이 다루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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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해도 멋지고 가까이 봐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좋은 안주 없이 탁주라도 멋지다. 가인이 없더라도 초동의 노래만으로 멋지다….”

 1760년에 태어나 1812년에 죽은 에세이스트 이옥의 글을 울적해지면 꺼내 읽는 게 버릇이 되었다. 아름다울 가(佳)가 무려 51번이나 등장하는 짧은 산문 ‘중흥유기’는 읽고 있노라면 세상이 돈짝만 해지는 흥취를 준다. 멋지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눈앞에 이렇게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고 내 몸엔 뜨거운 피가 도는데! 그런 기분이 확 든다. 한문이 이토록 쉬운 글이라는 것을 발견해내는 일도 기쁘다. ‘朝亦佳 暮亦佳 晴亦佳 陰亦佳 山亦佳 水亦佳 風亦佳 石亦佳…佛亦佳 僧亦佳.’

 근데 이런 글은 눈으로 읽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 소리 내어 낭송해야 흥이 난다. ‘조역가 모역가 청역가 음역가 산역가 수역가 풍역가 석역가…불역가 승역가’ 운율을 맞추는 새 목과 가슴과 뱃속이 절로 시원해지고 몸 안의 어둡고 탁한 기운이 바깥으로 몰려나간다. 대신 신선한 공기가 배 속으로 강력하게 흡입되니 머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뻥 뚫리는 감각을 맛볼 수 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하며 자란 세대다. 한 학급 60명이 눈감고 줄 맞춰 앉아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전체주의 국가이념을 담은 문장이었을지라도 낭송엔 리듬과 힘이 실려 아이들은 절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낭송이 끝난 교실엔 물로 청소한 것 같은 개운함이 감돌고 아이들 얼굴엔 든든한 뱃심 같은 것들이 생겨나 있었다. 동양식 서당교육이 서양식 학교 교육 안에 그런 방식으로 남아 있었을 때였다. 역사 시간엔 당연히 ‘태정태세문단세…’를 소리쳐 외면서 조선왕조사의 굴곡을 이해해 나갔다.

  어제는 초등학생, 중학생을 키우고 있는 30, 40대 후배들과 짧은 여행을 했다. 나는 그들의 젊음이 부러운데 그들은 나의 해방이 부럽단다. 도대체 무슨 해방이냐고 묻기도 전에 상황은 절로 드러났다. 엄마들의 전화벨은 돌아가며 울렸다. 아이 자신이, 담임선생이, 아파트 수위실이, 학원이, 과외선생이, 살림을 돌봐주시는 아주머니가! 끊임없이 엄마들에게 전화를 걸어와 뭔가를 요구하고 추궁하고 의논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방금 고학력 전문직답게 자존감 높은 발언을 해대던 여성들이 갑자기 비굴하고 어리석고 무능한 죄인으로 급변하는 양을 나는 멀거니 지켜봐야 했다.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살얼음을 밟는 일인 줄을 정작 내 아이를 키울 때는 몰랐다. 그들이 박장대소하며 공감하는 “대한민국에 중2가 있는 한 김정일도 두려워서 침공을 못 할 거야”라든지 “문 앞에 ‘중2 있음’이라고 써 붙여두면 도둑도 겁나서 도망가!” 같은 말도 전에는 모르던 유행어였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아이들을 교실 안에 하루 열 시간씩 가둬놓고 온 사회가 공부! 공부!를 닦달하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폭탄이 돼버린다.

 이런 아이들에게 예전 나처럼 교실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공부할 수 있는 길이라도 우선 열어줬으면 한다. 예전 서당에서 공부하던 방식대로 국어는 물론 영어와 수학과 역사와 과학을 다 같이 큰 소리로 암송하게 하면 개인의 좁아터진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다. 소리는 공명해서 몸 안의 파장과 진동을 바꾼다. 도서관과 교실이 조용해야 한다는 것도 근대식 교육의 편견에 불과하다. 묵독이 효율적이라고 누가 말했나. 탈무드 내용을 놓고 논쟁하는 유대인 학생들의 도서관은 귀가 얼얼하게 시끄러웠지만 그들의 학습은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몸 안으로 스며들어 평생의 가치관이 되지 않는가. 중학생 아이들에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인 학습법 대신 어리숙하고 해묵은 낭송법을 가르치자. 우선 백석과 서정주의 외기 좋은 시 구절부터! 목이 터지게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중학생은 고전 두어 구절, 한시 몇 수를 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뱃심이 생기고 이마에 의젓한 슬기를 띠게 될 것이다. 이옥의 말대로 “우린 멋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 놀러왔다. 닦달받으며 공부만 하면 평생 닦달받는 데 길들어버린다. 그래서는 눈앞에 멋진 세상을 두고도 “멋지다!”고 외칠 줄을 모른다.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