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Report] 과거로 돌아간 가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가구전시회장에 선보인 이탈리아 명품가구·인테리어 ‘미소니홈’ 전시장. 고전적 멋을 살린 디자인에 동양미 넘치는 장식과 미소니 특유의 문양을 융합했다. [밀라노=김창우 기자]

9일(현지시간) 오전 이탈리아 밀라노 도심에서 북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로(Rho) 지역에 자리 잡은 종합전시관 ‘피에나 밀라노’. 세계 최대의 가구 박람회인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i saloni)’가 열리는 곳이다. 이날 오전 9시 반 개막도 하기 전부터 수백 명의 관람객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전 세계 160개국의 2500여 개 업체가 참가해 20만㎡(6만 평)의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올해로 52회째를 맞는 메인 행사인 살로네델모빌레(가구전)뿐 아니라 2년마다 열리는 에우로루체(조명전)·우피치오(사무가구전)·사텔리테(젊은 작가전)도 ‘내일의 인테리어’를 주제로 함께 열렸다. 주최 측은 14일까지 외국인 20만 명을 포함해 모두 30만 명이 이 행사를 찾을 것으로 추산했다.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관통하는 올해의 키워드는 ‘복고주의’다. 과거 유명 디자이너들의 기념비적 작품을 소재와 디자인을 조금씩 바꿔 재해석해 내놓는 것이다. 유럽의 경기 불황을 반영하는 측면이 크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겸 평론가 마르코 로마넬리는 “소비자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저명한 제품을 새롭게 비틀어 보는 재창조인 ‘리-에디션’이 불황을 업고 주요 트렌드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가구업체 ‘드리아데(Driade)’는 거장 디자이너 안토니아 아스토리가 1980년대 선보였던 작은 탁자를 값비싼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에 대해 현지 전문가들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의 노스탤지어(향수)를 되새기게 한다”고 평했다. 당시 빈은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과 함께 회화와 디자인을 아우르는 아르누보 양식을 앞세운 분리주의 운동이 절정이던 곳이다. 세기말의 절망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가 교차하던 당시의 상황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재 유럽의 모습이 겹치는 느낌을 살렸다는 평가다.

  명품 가구업체 ‘폴트로나프라우(Poltrona Frau)’ 역시 유명 디자이너 가스톤 리날디가 50년대에 디자인한 안락의자 ‘DU55’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제품을 전시했다. 날아갈 듯한 팔걸이의 곡선에서 당시 산업 디자인을 휩쓸던 유선형 디자인의 열풍의 기억이 배어 있다.

 ‘플로스(Flos)’는 전설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지노 사르파티의 램프 5종을 전구만 백열등에서 발광다이오드(LED)로 바꿔 선보였다. 핀란드 가구 회사 아르텍(Artek) 역시 20세기 중반의 유명 디자이너 일마리 타피오바라의 작품을 재해석해 선보였다. 플로우(Flou)는 ‘타다오 베드’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보급형인 ‘그레이 오크’ 모델을 내놓았다. 거장 디자이너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90년대 초반 디자인한 이 침대는 헤드보드에서 밑판까지 널빤지를 이어 붙인 듯한 모습에 얇은 철 다리를 붙인 지극히 단순한 형태다. 모더니즘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맨 위부터 원목과 가죽을 이용해 만든 독일 디자이너 딕반호프의 의자, 유명 디자이너 안토니아 아스토리의 탁자를 대리석으로 재해석한 이탈리아 ‘드리아데(Driade)’사의 탁자, 1990년대 모더니즘 대작 ‘타타오’ 침대를 재해석해 보급형으로 만든 ‘플로우(Flou)’사의 ‘그레이 오크’ 침대.

  재해석된 것은 20세기 유명 제품만이 아니다. 10여 개의 가구 전시장 중 한 곳은 아예 루이 16세 시절부터 이어온 바로크풍 가구를 모아 놓기도 했다. 다만 모양을 단순화하고 금 대신 청동을, 황실 문양 대신 데코 타일을 사용했다. 절대 왕조의 권력자가 아닌 현재의 소비자들도 접근할 수 있게 현실적인 가격대로 만든 것이다. 마르코 사베타 살로네델모빌레 대표는 “최근의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가구업체들이 판매 실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검증된 클래식 가구를 다시 들고 나오는 현상은 엘리트 계층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눈을 돌리는 ‘디자인의 민주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고전주의를 뛰어넘는 혁신도 보였다. 메인 가구전과 별도로 열리고 있는 ‘젊은 작가전’에서다. 젊은 작가전은 35세 이하 디자이너가 출품한 작품이 전시되는 곳이다. 특히 우피치오(사무가구) 전시장에서는 프랑스 건축 디자이너 장 누벨의 ‘직장을 내 집처럼 프로젝트’가 주목을 끌었다. 누벨은 “30~40년 후 현대의 사무실을 보면 똑같은 모습의 가구가 반복적으로 배치된 말도 안 되는 구조에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누벨은 “집보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현실에서 사무 공간이 그저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직각이 아닌 약간씩 어긋난 가구 배치, 사각형뿐 아니라 원·타원 가구로 변형을 준 공간, 움직이는 벽과 자유롭게 탈·부착이 가능한 가구 등으로 이뤄진 사무실을 선보였다. 이와 함께 재택근무가 일상이 될 미래의 주택을 위해 거주 공간과 사무 공간을 조화롭게 배치한 주택 내부도 소개했다.

  소재의 혁신성도 돋보였다. 젊은 작가전에서는 원목뿐 아니라 유리와 금속을 포함한 다양한 재료로 만든 가구들이 전시됐다. 철골로 만든 가구 ‘애프터이미지’로 주목을 받은 가구 디자이너 박보미씨를 비롯한 16개국 700여 명의 작가들이 젊은 작가전에 참여했다. 뉴욕타임스는 “젊은 작가들과 신진 업체들 사이에서 자연친화적인 플라스틱과 가공을 최대한 줄인 가죽 등 친환경 제품의 출품이 활발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기업·디자이너도 약진=삼성전자는 이번 행사에 모니터·태블릿·노트북을 제공하는 공식 후원자로 참여했다. 가구업체들이 즐비한 전시장 한 편에 84인치 TV를 비롯한 다양한 전자제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해 눈길을 끌었다. 가구박람회와 맞춰 밀라노 시내 곳곳에서 열리는 디자인위크에도 많은 한국 기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자동차는 1만2000개의 아크릴 구와 8개의 레이저빔으로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였다. 권대섭·김익영·장경춘 등 한국 작가 16명이 내놓은 전통공예 작품 11점을 전시하는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전’도 디자인위크의 중심인 트리엔날레 디자인 전시관에서 열린다.

밀라노=김창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