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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순창의 기적이 슬픈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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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고속버스는 꼬박 세 시간 반을 달려 나를 전라북도 순창 터미널에 내려놓았다. 터미널을 나와 보니 봄볕이 따뜻했다. 아파트 몇 동 빼고는 낮은 지붕들만 눈앞에 펼쳐졌다. 스타벅스 대신 ‘별다방’이 보였다.

 순창을 찾은 건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기사 때문이었다. 서울대 2명, 연세대 4명, 성균관대·한양대·이화여대·중앙대·경희대·홍익대…. 기사는 “순창군 옥천인재숙이 2013학년도 대학입시에서 35명 전원 합격이란 역대 최고 성과를 거뒀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대목이 걸렸다. 군청에서 운영하는 기숙형 교육시설? 중3부터 고3까지 20%의 성적 우수자만 선발해 집중 교육을 시킨다?

 옥천인재숙은 터미널에서 1.2㎞ 떨어진 언덕에 서 있었다. 지상 3층의 학습동과 지하 1층, 지상 4층의 기숙동. 김용기(65) 원장은 이제 만 10년이 된 인재숙의 산증인이다.

 “제가 군청 행정과장으로 있던 2007년 도 교육청과 겁나게 실랑이를 했지요. 불법 기숙학원이다, 공교육 침해다… 전교조도 왜 군민들 세금 갖고 소수 학생만 특혜를 주느냐고 했는데 주민들이 삭발도 하고 데모도 해서….”

 인재숙은 2003년 강인형(68) 전 군수 주도로 문을 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황숙주(67) 군수도 “인재숙 없이는 공교육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정원 200명에 1년 운영비 12억원. 교육문제를 해결해 인구 유출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이다.

얼마 전만 해도 주민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면 광주나 전주로 빠져나갔다. ‘교육 엑소더스’는 인재숙이 성과를 내면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정대균(50) 인재양성 담당 계장은 “정원 미달로 어려움을 겪던 학교들이 지금은 인근에서 오는 학생들이 늘면서 더 이상 전학을 받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오후 6시가 되자 교복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인재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기숙동 입구에 가방을 내려놓고 구내 식당으로 향했다. ‘고2는 2시 이후 출입금지!! 전부 취침할 것!’ 심야자습실 경고문이었다. 중3 강의실에 들어갔다. 책과 공책을 펴놓고 올망졸망 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인재숙에서 가장 힘든 게 뭐예요?

 “잠! 잠요. 잠이 모자라요.” “인제 괜찮아요. 적응이 돼서….”

 -그럼, 학교 가서 안 졸려요?

 “졸려요.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시간표는 엄격하다. 밤 11시까지 언어·수학·영어 수업을 듣는다. 이후 중3~고1은 새벽 1시(12시 의무, 1시 자율), 고2~고3은 2시(1시 의무, 2시 자율)까지 공부한다. 한 달에 주말 두 번만 집에 갈 수 있다. 과목별 과락이 다섯 번 나오거나 벌점이 30점을 넘으면 짐을 싸야 한다. 매년 11월에 치르던 선발 시험을 올해부터는 5월, 11월 두 차례 실시해 학생들의 긴장감을 높이기로 했다. 강사 12명도 매년 수도권 학원 등에서 시험강의를 통해 채용한다.

 과연 정상적인 교육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 애기(아이)들은 왜 명문대에 못 가느냐” “서울 애기들 뒤꽁무니만 따라가게 할 순 없는 것 아니냐”는 순창 사람들의 절박함에 누구도 돌을 던지기 힘들 것이다. 김영철(51) 교무실장은 “저소득층, 한 부모 가정, 조손 가정 자녀도 있지만 또래와 어울려 구김살 없이 공부하고 있다. 만약 이런 공간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됐겠느냐”고 되물었다.

 깊은 밤 어둠에 잠긴 순창 들녘, 인재숙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도시의 아이들, 그들과 밤 늦게까지 경쟁해야 하는 순창의 아이들. 엉킬 대로 엉킨 한국 교육의 문제를 풀 방법은 없는 걸까. 왜곡된 교육 구조 속에서 평등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순창의 불빛은 분명 기적이었지만 그 기적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