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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똑똑한 뭔가를 만드는 게 평생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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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11면

수퍼 컴퓨팅 전문기업 클로닉스의 권대석 대표가 일반 CPU 100여 대를 연결해 만든 수퍼컴퓨터를 소개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1993년 서울 신림동 서울대 공과대학의 한 연구실. 10여 명의 대학원생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2년여의 연구기간과 수억원의 연구비를 들여 고성능 컴퓨터를 만들려 했지만 결과물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최신형 중앙처리장치(CPU)를 장착한 일반 컴퓨터보다도 처리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연구원들 사이에서 말단 실무를 맡은 대학원 신입생 한 명이 침묵을 깼다. “새로 컴퓨터를 만드느라 3년씩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차라리 사양이 제각각인 서버 컴퓨터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활용하면 수퍼컴퓨터의 성능을 낼 수 있지 않겠느냐.” 좌중엔 침묵이 흘렀다. 즉 수퍼컴퓨터용 하드웨어를 따로 개발하지 말고 PC나 소형 서버를 몇백 대씩 네트워크로 묶어 수퍼컴퓨터로 쓰자는 얘기였다. 90년대 초부터 미국 프린스턴대와 스탠퍼드대, 미항공우주국(NASA)도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값싼 수퍼컴퓨터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파워 차세대 <24> 국내 첫 수퍼컴퓨팅 전문업체 클루닉스 권대석 대표

 연구실의 막내이면서도 당돌하게 의견을 낸 인물은 권대석(44) 클루닉스 대표다. 클루닉스는 국내 최초의 수퍼컴퓨팅 전문업체다. 수퍼컴퓨터를 만들고 활용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분석하는 게 주된 업무 영역이다.

 권 대표의 아이디어가 실현된 것은 그보다 5년 뒤인 98년. 권 대표는 학교 곳곳에서 컴퓨터 7대를 모아 수퍼컴퓨터를 만들어냈다. 수퍼컴퓨터의 이름은 누더기란 의미의 ‘Patchwork’로 했다. 기존 수퍼컴퓨터들을 구입하려면 수백억원이 드는 데 비해 일반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클러스터링을 활용하면 비용도 훨씬 적게 들었다. 이때만 해도 클러스터링으로 수퍼컴퓨터를 만드는 일은 해외에서도 드문 사례였다. 권 대표는 99년 이를 토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1호 수퍼컴퓨터 박사였다.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여러 대학과 기관들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갖고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 여러 대를 동시에 한 대처럼 원활하게 구동시켜 주고 업무량도 적당히 분배할 수 있다면 적은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수퍼컴퓨터를 운용할 수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덧붙였다. 99년엔 전 세계 상위 500대의 수퍼컴퓨터 중 6대(1.2%)만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2010년에는 전 세계 상위 500대의 수퍼컴퓨터 중 99.6%(498대)가 클러스터링을 통해 만들어졌다.

IQ 155 ‘천재소년’… 컴퓨터만 파던 외톨이
서울 문래동 에이스하이테크 시티 12층의 클루닉스 사무실에서 권 대표를 만났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그에겐 총기가 넘쳤다. 사무실 안의 대형 화이트보드에는 각종 수식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화이트보드 뒤편으론 간이침대가 보였다. 밤샘 작업을 할 때 쉬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며 그는 멋쩍게 웃었다.

클루닉스가 제작해 서울대에 납품한 국산 최고속 컴퓨터 테라곤의 모습. [사진 클루닉스]

 회사 이름인 클루닉스는 클러스터(cluster·집합)와 소프트웨어 개발용 운영체제인 유닉스(Unix)를 합한 것이다. 수퍼컴퓨팅 전문업체답게 100대 넘는 CPU를 묶은 수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수퍼컴퓨팅 전문기업이지만 권 대표가 처음부터 이 사업을 작정한 건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남다른 천재소년이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고교 장학퀴즈를 즐겨 봤다. 중학교 때 지능검사에선 155(IQ)를 받았다. 그는 “IQ를 잴 때 학교에서 155점이 만점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지나친 똑똑함은 그를 외톨이 청소년으로 만들었다. 권 대표는 “세상에서 나만 제일 잘나고, 공부를 못하는 친구와는 말도 섞지 않는 그런 못된 아이였다. 그런 탓에 고등학교 때까지 친하게 지낸 친구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또래 친구와 놀아야 할 시간을 그는 독서와 컴퓨터 연구로 보냈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생이던 79년 초. 국내 도입 초기였던 애플2 컴퓨터가 시작이었다. ‘과학소년’은 독학으로 베이직·어셈블리 등을 활용해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그는 “어린 마음에 인간보다 똑똑한 뭔가의 존재를 만들겠다는 걸 평생의 꿈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컴퓨터 관련 전공을 하게 된 게 우연이 아니었다.

장학퀴즈 출연자 모임 ‘수람’과 깊은 인연
고교생들이 출연하는 TV 퀴즈 프로그램 ‘장학퀴즈’도 그에겐 빼놓을 수 없는 의미가 있다. 고교 2학년이던 86년 출연해 기(期) 장원을 차지했다. 장학퀴즈 참가자 모임인 ‘수람’은 그에게 단순한 친목회 그 이상이다. 73년 2월 장학퀴즈가 시작된 만큼 회원 숫자가 1300여 명을 헤아린다. 쟁쟁한 인물도 많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수람 회원들과 자주 만나면서 내가 그간 얼마나 거만하고 옹졸한 인간이었는지 알게 됐다”고 말할 정도다. 창업에 필요한 자본금을 대준 것도 수람 회원인 김덕우 우리기술 대표다. 배우자인 김소헌 클루닉스 이사 역시 장학퀴즈 출신이다. 권 대표는 “SK그룹의 고 최종현 회장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있다는 신념 아래 장학퀴즈 후원을 결정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혜택도 누렸다.

 그는 당초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미국 실리콘밸리의 어느 기업에 취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국내 1호 수퍼컴퓨터 과학자란 사람이 장학금은 한국에서 받고, 미국에 가서 수퍼컴퓨터를 만들면 되겠느냐”는 수람 선배들의 말에 계획을 바꿨다. 결국 2000년 대학원 후배 6명과 함께 클루닉스를 차렸다. 2000년대 초 미국의 한 IT업체가 클루닉스 인수를 제안했을 때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한국서 받은 혜택 갚고 싶어 미국행 포기
그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현재 컴퓨터공학부의 전신)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모두 받았다. 국내 최초 수퍼컴퓨터 박사였지만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창업 초기엔 수퍼컴퓨팅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수퍼컴퓨터 하면 기상청에서 날씨를 예측하는 데 쓰는 도구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사업이 너무 힘들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며 “사업을 하려면 상품·고객 등 갖춰야 할 게 많은데 우리는 기술만으로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수퍼컴퓨팅을 활용한 빅데이터 분석 시장은 아직 기업들 사이에서 생소한 개념이다. 데이터가 아무리 많아도 기업들은 정보 공개를 꺼린다. 권 대표에겐 만만치 않은 산(山)이다. 대기업 계열의 한 IT업체 관계자는 “수퍼컴퓨팅을 활용해 값진 정보를 캐낸다는 착안점은 좋지만 다른 회사에 금싸라기 같은 정보를 통째로 내줘야 한다는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미국 같은 IT 선진국에서도 빅데이터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다.

 그러나 권 대표는 빅데이터의 유용성에 주목한다. 수퍼컴퓨터를 활용해 얼핏 무질서해 보이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일정한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기업 경영·마케팅 등에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스마트폰이 급속히 대중화된 것처럼 수퍼컴퓨터도 비슷한 확산 패턴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기업들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포스코가 대표적이다. 클루닉스의 시스템(아렌티어)을 도입해 수백 명의 연구원이 동시에 수퍼컴퓨터에 접속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업무 내용을 직원들이 손쉽게 공유할 수 있고, 1억원에 육박하는 공학용 프로그램을 공동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덕분에 포스코는 연간 40억원이던 프로그램 유지비용을 연 10억원 선으로 줄였다고 한다. 자료 해석과 대기에 드는 시간도 사안에 따라 최대 20배가량 빨라졌다. SK텔레콤은 클루닉스를 통해 매일 수십억 건씩 쌓이는 고객 통화 패턴 데이터를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하루 종일 사람 손을 떠나지 않는 휴대전화인 만큼 사용 패턴을 어떻게, 얼마나 빨리 분석하느냐에 따라 강력한 마케팅 기법을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통화량만 잘 분석해도 어느 장소에서 어떤 제품이 잘 팔릴지 예측하는 등 상권 분석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클루닉스는 서울대에도 석유탐사용 수퍼컴퓨터를 만들어 납품했다. 물론 클러스터링 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순정만화 평론 분야에서 인정받는 논객”
권 대표는 전공인 컴퓨터 분야뿐 아니라 경제·역사·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2011년엔 당시 지식경제부로부터 ‘IT융합기업인상’을 받았다. 금융·조선·에너지·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 수퍼컴퓨팅과 클라우드 기술을 보급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 이름 붙인 그의 블로그(http://blog.naver.com/hyntel)는 누적 조회 수가 81만 건이 넘는다. 수퍼컴퓨터 관련 정보는 물론 맛집 소개, 만화 리뷰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학교 때부터 순정만화 평론 분야에서 나름 좋은 평을 받는 논객이었다”며 웃었다. 그는 수퍼컴퓨팅을 통해 실업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 가능하다고 본다.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다 분석·예측 능력 자체를 상품화한다면 신산업을 일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권 대표는 “수퍼컴퓨터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은 기업이나 정부기관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삶에도 머잖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손쉽게 빅데이터와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 회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클루닉스의 사시(社是)가 ‘Supercomputing for everyone(모든 이를 위한 수퍼컴퓨터)’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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